첫 번째 남자가 내 옷을 벗겼다. ― 내 옷을 벗기는 그의 손을 내 꼭 찍어버리라 다짐했다. 두 번째 남자가 내 몸을 바라보았다. ― 내 몸을 바라보는 그의 눈을 내 꼭 뽑아버리리라 다짐했다. 세 번째 남자가 내 입술을 핥았다. ― 내 입술을 핥는 그의 혀를 내 꼭 잘라버리리라 다짐했다. 네 번째 남자가 내 몸을 만지고 맛보았다. ― 내 몸을 만지는 그의 손과 나를 품은 그의 입을 내 꼭 찢어버리리라 다짐했다. 다섯 번째 남자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 내 안으로 들어온 그를 내 꼭 죽여 버리리라 다짐했다. 여섯 번째 남자가 나를 안고 울어주었다. ― 하지만 나는 그를 모른다. 나는 이미 죽어 있었다. “죽었습니다.” 사체의 목덜미에서 손을 떼며 태윤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농담해? 저 상태로 살아있으면 그게 좀비지, 사람이야?” “자세한 사망 시간은 감식반이 와 봐야 알겠지만… 사체의 상태로 봐선 이틀 쯤 된 것 같습니다.” 위에서 들려오는 무뚝뚝한 말소리에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태윤은 무릎을 폈다. 태윤의 경찰학교 3년 선배이자 현 서울지검 강력부 강력과 동료인 한 호(韓浩)는 젖은 점퍼 안 쪽에서 젖은 담뱃갑을 꺼내어 들었다. 비에 젖어 마치 하나의 덩어리처럼 붙어버린 담배개비들을 툭툭 친 다음 하나를 꺼내 물자 칙, 하는 소리와 함께 노란 불꽃이 눈앞에 디밀어졌다. “금연하신다더니.” “내일부터.” “그냥 피우세요.” “너 서운 할까 봐.” 툭- 태윤의 손에 들린 라이터를 손등으로 치며 호는 뺨이 음푹 패일만큼 깊게 연기를 빨아들이며 반쯤 열린 현관문 사이로 밖을 바라보았다. “징그럽게도 오는군.” “이것도 기상이변이죠?” “몰라. 요즘 제대로 되는 게 뭐가 있어. 멀쩡하게 잘 살던 목사 양반이 약먹고 죽어 나자빠지는 판에.” “그것도…….” 태윤은 흘깃 방 한쪽 구석에 쓰러져 있는, 이미 썩기 시작한 남자의 시체를 바라보며 중얼 거렸다. “식칼로 자기 눈까지 찌르고 말이죠.” 여섯 번째 남자 하나님은 나의 주님이시니, 주의 자비하심을 나에게서 거두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은 한결같은 사랑과 미쁘심으로, 언제나 나를 지켜 주십시오. [시편 40:11] 「 다음 소식입니다. 서울시 종로구 창신동의 한 교회 목사가 숨진 지 이틀 만에 교회 신자에 의해 발견되어 신자들은 물론, 마을 주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숨진 목사는 삼십대 초반의 임모씨로 검찰에 따르면, 임씨는 지난주일 예배를 마친 후 자신이 여행을 떠날 예정이니 당분간 평일 예배는 없을 것이라고 신자들에게 전했다고 합니다. 이틀만에 자택의 서재에서 발견 된 임씨는 치사량의 독극물을 먹고 숨진 상태였다고 합니다. 검찰은 정황으로 미루어 임씨의 자살을 미리 계획된 것으로 판단, 가족과 교회 신자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벌이고 있습니다. 숨진 임씨는 지난 99년부터 4년째 종로구 한 교회의 목사직을 맡고 있었으며…… 」 “…… 칼 얘기는 쏙 뺐군요.” “빼야지.” “역시 자살로 밀어붙이는 겁니까.” 태윤이 이마에 솟아오르는 땀을 휴지로 닦으며 말했다. 며칠 째 퍼붓는 비로 온도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입을 열면 입김이솟아오르는 바깥에 비해 식당 안은 땀이 날 정도로 더웠다. “타살이라는 증거 있나?” “그렇게 따지면 자살이라는 증거도…… 많군요.” “많지.” 그렇게 말한 호가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국물이 아직 반도 더 넘게 남은 그의 그릇을 바라보며 태윤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식욕, 없으세요?” “잠을 못 자서.” 엣? 태윤이 잘못 들은 게 아니냐는 식으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잠을 못 주무셨으면 식사라도 잘 하셔야죠.” “피곤하니까 목구멍으로 넘어가지도 않아. 늙으니까 내 몸도 내 마음대로 안돼.” “과장이 들으면 거품 물고 쓰러져요.” 태윤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금세라도 숨이 넘어 갈 듯 헉헉거리는 과장을 상상하며 괴로운 웃음을 지었다. 올해 쉰둘이 되는 강력과의 박 진 과장도 소싯적에는 단단한 근육과 강한 체력을 자랑하는 호남이었다. 하지만 일선에서 날리던 그도 승진이란 걸 하게 되자 보다 편안한 데스크 업무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그와 동시에 불어나기 시작한 체중은 이제는 겉잡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무게로 그의 의자를 짓누르게 되었다. 과장은 이제 조금이라도 큰소리를 낼라치면 그대로 헉, 하는 소리와 함께 의자에 주저 앉아버린다. 의자에 앉은 그는 두개가 되어버린 턱으로 컥컥거리는 헛기침을 하며 부하들의 잘못을 나무라는데 그 모습이 영락없는 황소개구리다. 그렇게 불과 몇 년 만에 세월을 앞지르며 달려간 그의 외모와 비교할 때 눈앞의 남자는 참으로 젊다. 아니, 젊었다. 호의 나이는 올해로 서른일곱. 불과 4년 전만 하더라도 어느 누구도 한번에 그의 나이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190에 육박하는 큰 키, 한숨이 나올 만큼 단단하게 벌어진 어깨, 빈틈없이 조여진 근육…… 4년 전이라고 해도 이미 삼십대 초반이었던 호는 당시에 어느 누구라도 이십대의 학생으로 볼 만큼 눈부신 젊음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년도 채 못 되는 시간 동안 그는 늙어버렸다. ‘나이를 먹었다’ 는 표현이 더 정확할 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그는 단숨에 자신의 나이를 찾았다. 큰 키와 벌어진 어깨는 여전하지만 며칠이고 이어진 술과 쉬지도 않고 피워댄 담배로 피부는 엉망이 되어버렸고 표정이 떠난 그의 얼굴은 늘 어두웠다. 마치 산송장 같았던 그 때에 비하면 지금은 그나마 사람다운 인상이지만 여하튼 태윤은 단번에 제 나이를 찾은 그의 모습이 조금 많이 안타까웠다. 어쩌면 그가 한번에 제 나이를 찾게 된 이유에서 그 쓰린 마음을 찾은 건지도 모른다. “한 선배, 요즘 어디 안 좋으신 거 아닙니까?”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호는 뻑뻑한 눈을 부비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태윤이 처음 호를 알게 된 건 경찰학교 실습 기간 중에 은행 강도를 잡은 4학년이 있다는 소식으로부터였다. 당시 1학년이던 태윤은 마치 제 일 인양 떠들어대는 동기들 틈에서 흥분된 얼굴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름은 한 호, 나이는 스물 셋. 아버지와 할아버지부터 온 식구가 이쪽 계에 종사하는 유명한 경찰 집안의 자제라고 했다. 마치 드라마의 주인공 같다고 태윤은 생각했다. 그리고 졸업식 당일, 총장 표창을 받기 위해 단상으로 올라가는 호를 보며 태윤은 생긴것도 드라마라고 감탄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앞으로, 마치 그린 듯 한 미래를 걷게 될 졸업생을 마음으로부터 부러워했다. 하지만……. “나가지.” “예? 아, 예.” 눈앞의 남자의 짧은 권유에 태윤은 잠에서 깬 듯 멍하게 대답했다. “얼맙니까.” 카운터에서 지갑을 꺼내며 그렇게 묻는 남자를 깜짝 놀란 태윤이 말렸다. “한 선배, 관두세요. 제가 내겠습니다.” “됐어. 집에 갈 때 딸내미 과자나 하나 사가라고.” 무뚝뚝하게 말한 뒤 먼저 식당을 나서는 호의 등을 보며 태윤은 가슴이 저렸다. 하지만 8년 만에 만난 남자는 태윤의 예상과는 달리 처참하게 무너져 있었다. 2학년이 되던 해, 태윤의 부친이 운영하던 작은 중소기업이 도산했다. 빚을 지고 감옥에 들어 간 부친을 대신 해 스물 한 살의 태윤이 집안의 생계를 책임 져야했다. 결국 2학년 봄, 학교를 자퇴한 태윤은 그 길로 공장으로 들어갔다. 한 달 월급 150만원을 받으며 아침부터 밤까지 일을 하고 또 했다. 그리고 3년 만에 출소한 부친은 태윤이 마련한 소박한 사업자금으로 다시 일을 시작했고 예년의 실력을 발휘한 부친이 빚을 갚고 서서히 기반을 마련할 무렵 태윤은 군에 입대했다. 군 복무기간 동안 접어두었던 경찰에의 꿈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틈틈이 필요한 공부를 해 오던 태윤은 제대한 바로 그 해, 경찰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비록 길게 돌아왔지만 그토록 바라던 경찰이 된 태윤은 떨리는 마음 그대로 열심히 업무에 임했고, 2년 만에 치룬 첫 번째 승진 시험에 무난하게 합격했다. 그리고 원하는 업무 지역의 배치를 요할 수 있다는 국가의 방침에 따라 본청의 경무부를 찾아간 태윤은 한때는 경찰학교의 동기였던 경무부의 간부 하나로부터 반가운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너, 우리 경찰대학 졸업생 한 호 선배 기억 나냐? 그 선배 지금 서울지검에 있어.” 그 한마디에 태윤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원하는 업무지에 서울지검 강력과를 써 넣었고 두달만에 경장의 직위로 서울지검에 발령 받았다. 그리고, ‘김 경장도 알다시피 형사과는 외부근무가 주야. 일단은 우리 관할지를 익히는 게 중요하니까 틈나는 대로 파트너 되는 형사랑 돌아봐.’ 건실한 인상의 계장이 그의 자리를 안내하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김 경장 파트너…… 조만간 바뀔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잘 지내 봐. 그 사람이 원래 경감이었는데 요 일년 사이에 하도 일을 많이 쳐서 이쪽으로 내려앉았어. 거기다 얼마 전에 큰 사고하나 터뜨리고 병원에 입원 중이거든.’ ‘큰 사고요?’ ‘검사가 다쳤어. 범인도 죽고. 업무상 과실이긴 하지만 한 형사가 요즘 워낙에 사고를 쳐 대서 위에서 보는 눈이 곱지 않아.’ ‘한 형사……요?’ ‘아, 자네 파트너 될 형사. 이름이 한 호야. 한 호 형사. 일주일 쯤 있으면 퇴원이지만 한번 인사라도 가 봐. 뭐… 조만간 전출되겠지만.’ 그 때의 충격이란. 서울지검 강력부 강력과라고 하길래 부장은 못 되어도 과장은 된 줄 알았던 그가 말단 형사직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것도 경감의 자리에 있던 사람이 사고를 치는 바람에 바닥으로 내려앉았단다. 이게 무슨 일인가하며 어버거리고 있는 태윤에게 맞은편에 앉은 남자 하나가 웃으며 인사했다. ‘김태윤 경장?’ ‘아, 네.’ ‘반갑소. 나는 이기형이오. 당신이랑 같은 경장이지.’ 그리고 이경장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태윤은 어째서 경찰대학의 영웅이 강력과의 골칫덩이로 전락하게 되었는지, 그 가슴 아픈 경위에 대해 알게 되었다. * 회의실은 고요했다. 연일 계속되는 비로 사람들은 모두 지쳐 있었으며 직사각형의 긴 테이블 끝의 박과장은 연신 흘러내리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내고 있었다. “검시 결과 나왔나?” “네, 시안화칼륨에 의한…,” “그냥 청산가리라고 해.” 박과장의 퉁명한 목소리에 검시관이 낮게 헛기침을 했다. “청산가리에 의한 급사로 입에서 아몬드 냄새가 나고 온 몸의 근육이 경직된 것으로 보아 호흡기가 아닌 입,” “그만, 그만. 아무튼 청산가리 먹고 죽었다는 얘기잖아. 거 참… 내가 늘 말하는데 제발 간단하게 좀 해. 이거나 저거나 똑같은 얘기 하면서 뭘 그렇게 길게 말해. 다음부턴 그냥 간단하게 해. 청산가리 먹고 죽었다. 알았어?” “…….” 검시관은 대답대신 고개를 숙였다. 박과장의 짜증으로 한층 더 무거워진 회의실의 공기 속에서 강력계 팀원들은 하나 같이 침묵을 지키고만 있었다. “그럼 임수호는 청산가리에 의한 음독자살로 처리한다. 이의 있는 사람―.” 말 끝을 무겁게 내림으로써 ‘혀용 하지 않는다.’ 의 의미를 강하게 내보인 박과장은 쥐죽은 듯 조용한 회의실을 흡족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테이블에 놓인 자신의 녹차를 한 모금 마신 뒤 ‘그럼 이걸로 임수호 자살사건 최종 검토는 끝……’ 이라고 마무리를 지으려는 찰나, “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 된 곳에 한 호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경악에 가까운 눈빛으로 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놀라긴 태윤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이틀 전 뉴스를 보면서도 결국 자살이냐는 자신의 말에 ‘타살이라는 증거 있나?’ 하고 삐딱한 반응을 보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지금 -최종검토, 그것도 과장의 마무리- 에 와서야 내사가 필요하다니. “한 형사. 지금 뭐라고 했나?” “내사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내사아~?” 박과장의 눈이 불이라도 뿜을 듯 번뜩였다. 동료들은 두 사람이 연출 해 내는 더욱 더 숨 막히는 상황 속에서 잔뜩 긴장한 얼굴로 마른 침만을 삼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숨을 멈추고 마른 침을 삼키는 이유는 단지 박과장의, 마치 터질 듯한 얼굴이 반영하고 있는 그의 불편한 심기가 아니었다. 그들의 긴장의 이유는 내사를 요구한 형사에게 있었다. 그는 한 호 였다. 한 호가 누군가. 경찰대학 실습 중에 은행 강도를 잡아 졸업 땐 총장상을 탈 정도로 유능한 인재였다. 그 후로 기동대 소대장과 본청의 경위를 거치고 눈부신 활약으로 서른 하나라는 젊은 나이에 무궁화 두개를 달았던 사람이다. 하지만 자신이 집어넣은 죄수에 의해 부인과 세살 난 아들이 무참하게 살해당한 뒤로 마치 딴 사람이 되어 술과 담배에 쩔어 살았다. 그 일년 동안에 친 무수한 사건과 사고들은 그를 서에 발도 못 붙이게 하기에 충분 했지만 (단, 범죄자로 들이기에는 충분했다) 그 간의 공적과 가족을 잃은 그의 심정을 참작해 말단 형사로 직위를 내리는데 그쳤다. 그 후로 3년. 잡아 오라면 잡아오고, 놓아 주라면 놓아주고 조서를 꾸미라면 꾸며오고…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묵묵히 시키는 일만 해 온 한 호였다. 그런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3년 만에 처음으로. “자네 내사가 도대체 뭔데 지금 내사가 필요하다는 건가.” “내사란 범죄의 혐의가 뚜렷하지 않아 정식 입건은 불가능하지만 진정이나 투서가 있거나 혹은 그 진정 등이 없더라도 조사를 해 볼 필요가 있는 경우에 정식 입건을 하지 않고 내부적으로 조사 하는 걸 말합니다.” 거침없이 말하는 호의 얼굴을 바라보며 모든 사람들이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들의 두 배는 될 만큼의 눈을 부릅뜨며 박 과장이 외쳤다. “그래서! 임수호가 자살한 게 아니라는 진정이나 투서가 있었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무슨 내사야, 내사는!” “진정이나 투서가 없더라도 조사를 해 볼 필요가 있는 경우엔 정식 입건은 관두더라도 내부 조사는 가능하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내사란 그런 거지요.” 금방이라도 까무러치려는 박 과장에 비해 호는 너무나 태연했다. “그럼 한 형사님께서는 이번 사건이 진정 없이도 조사를 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씀 하시는 겁니까?” 이번엔 소리가 들려온 회의실 문 쪽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달려간다. ‘윤지운…….’ 태윤은 문 앞에 서서 자신들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는 한 남자와 자신의 옆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습니다.’를 말하는 남자를 번갈아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차장 검사님께 들었습니다.” 불쑥 흘러나온 목소리에 노크를 하려던 태윤의 손이 멈추었다. 손님이 있나보다 하며 돌리려던 그의 발걸음을 붙잡은 건 이어진 남자의 말이었다. “범인이 죽은 건 제 탓입니다. 한 형사님이 다치신 것도, 아니, 그 사건의 책임은 모두 제게 있습니다. 왜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으신 겁니까.” 태윤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눈치 채기도 전에 또 다른 목소리 하나가 병실에서 흘러나왔다. “됐습니다. 끝난 일입니다.” 지친 음성이었지만 묘하게 박력 있는 목소리. 한 호였다. “끝난 일이 아닙니다. 지금 상부에 보고할 생각입니다. 한 형사님은 범인을 뒤쫓다 인질로 잡힌 날 구해 준 죄 밖에 없다고 하겠습니다. 제 탓입니다. 제가 생각도 없이 공을 세우려는 욕심에만 눈이 멀어 그런 멍청한 짓을 저지른 겁니다. 한 형사님은 오히려 절,” “죄송합니다만 윤지운 검사님. 피곤합니다.” 호의 목소리로 태윤은 간신히 상대방의 정체를 알았다. 윤지운 검사. 첫날 자신을 안내 해 준 계장에 말에 의하면 그가 잡은 범인을 한 호가 실수로 놓치고, 그 바람에 범인이 휘두른 칼에 윤지운 검사가 다쳤다고 했다. 그리고 쓰러진 윤지운 검사에게서 총을 빼앗은 범인이 한 호를 쐈고, 총을 두 방이나 맞은 상태에서 범인과 격투전을 벌인 한 호는 그의 손에 수갑을 채우는 즉시 정신을 잃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 모두 강 검사의 탓이라고? 인질? 구해줘? “……죄송합니다. 많이 다치신 분 앞에서 제가 생각 없이 굴었군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이제 오실 필요 없습니다.” 호가 무뚝뚝한 목소리 그대로 말했다. “하지만 상부에는,” “됐습니다. 정말로 절 생각해서 이러시는 거라면 이제 됐습니다. 지금 와서 한 호가 거짓말을 한거다, 사실은 이러이러한 사정이 있었다고 말한다 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검사님의 입장만 곤란 해 질 뿐입니다.” “하지만 이대로 있으면 한 형사님에 대한 처분이 무거울 겁니다.” “…….” 잠시 병실 안에선 아무런 소리도 나질 않았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한원일 총경님 맞으십니까.” “…….” 호가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윤지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초등학생 때 유괴되어 죽은 형이 있습니다. 그 때 형의 사건을 담당하셨던 분이 한 총경님이십니다. 당시엔 경사님이셨죠. 비록 범인은 잡지 못했지만 부모님은 한 총경님 덕을 많이 봤다고 하셨습니다. 은인이라고… 우리 가족의 은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서울지검 강력과를 자청한 건,” “언제 가실 겁니까.” 윤지운의 말을 자르며 호가 차갑게 말했다. 노골적인 그의 태도에 윤지운이 한숨을 쉰다. 그리고 뚜벅 뚜벅 문으로 다가오는 말소리에 태윤은 잽싸게 복도로 몸을 뗐다. “어쨌거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형사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 이렇게 멀쩡히 돌아다니지도 못하겠지요.” 문 앞에 선 윤지운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상황이면 어느 누구나 그렇게 행동했을겁니다.” 한 호는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로 대꾸했다. “하지만 제게 그 누구는 당신이었습니다. 하필이면 말이지요.” 병실 문이 열리고 윤지운이 나왔다. 태윤은 문을 등지고 선 채 멀어지는 윤지운 검사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내사를 요구하는 근거는?” 정신이 들었을 때는 윤지운을 포함 모든 팀원들의 시선이 자신의 옆 자리인 호를 향한 상태였다. 윤지운은 팔짱을 낀 채 냉정한 목소리로 한 호에게 물었다. “없습니다. 아무것도.” 한 호는 태연하게도 그 말을 입에 올렸다. 없/습/니/다/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없어? 그런데 뭐가 어쩌고 어째? 내사? 자네가 지금 제정…!!” “박과장님.” “…….” 윤지운의 한마디에 황소개구리가 입을 다물었다. “분명 내사는 진정이나 투서 없이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많든 적든 수사원을 움직이기 위해선 내사사건부에 기재 할 수 있는 ‘근거’ 가 필요합니다. 무턱대고 ‘이유 없음’ 이란 한 마디로 칸을 채우고 사건부로부터 허락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계시겠지요, 한 형사님.” “잘 알고 있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임수호의 자살 사건에 대해 내사를 요구 할만한 근거가 있습니까?” 회의실은 이제 두려울 정도의 고요함에 휩싸였다. 좌중의 시선 앞에서 한 호는 무뚝뚝하게, 하지만 트레이드라고 할 수 있는 태연함으로 말했다. “없습니다.” 순간적으로 윤지운의 안경 너머로 실망의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그걸 눈치 챈 건 오로지 김태윤 뿐이었다. “그럼 이야기는 끝입니다. 내사는 없습니다. 임수호 사건은 독극물에 의한 자살로 결정짓습니다.” 윤지운 검사의 냉정한 목소리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눈앞의 종이컵을 들던 박과장은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구석에서 들려오는 한 호의 느긋한 목소리에 한쪽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남은 녹차를 마셨다. “도대체 왜 그러셨어요.” 짧은 시간동안 진행된 회의는 길이의 장단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무거운 공기에서 벗어나 비척거리며 사무실 책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잠시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하고 외친 호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빠져나왔다. 태윤은 아직도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호를 뒤따랐다. “뭐가.” “갑자기 웬 내사 타령 이시냐구요. 바로 엊그제만 해도 자살이라고 하셨잖아요.” “내가 한 번이라도 자살이라고 말한 적이 있던가?” “그…….” 호의 반격에 태윤은 입을 다물었다. 분명 그는 임수호는 자살을 했다고 말 한 적이 없다. 다만 타살이라는 증거가 있느냐고 물었을 뿐이다. “한 선배 은근히 교활하시군요…….” “자네가 멍청한거야.” 그렇게 말하며 담배를 입에 무는 호에게 태윤은 습관처럼 라이터를 들이밀었다. “그럼 선배, 임수호가 자살이 아니라고 할 만한 근거가 분명히 있기는 한겁니까?” “없어.” 호는 습관대로 처음 한 모금을 길게 빨아들였다. 태윤이 그게 뭡니까… 하며 실망의 목소리를 흘리는 동안 검은 양복을 입은 한 무리가 서쪽 출구에서 빠져나왔다. 눈을 가늘게 뜬 채 그 검은 무리를 바라보던 호가 마지막 한 모금을 끝으로 손에 든 담배를 떨어뜨렸다. 호의 발 아래 짓이겨진 담배는 꽁초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겨우 세 모금을 빨린 장초였다. “선배? 어디가세요?” 빗속을 뚫고 그 검은 무리를 향해 달려가는 호를 향해 태윤이 소리쳤다. “선배! 한 선배!” “류병우에 대해 알아 봐!” 갑자기 호가 큰 소리로 외쳤다. “네?” “류병우! 류병우에 대해 조사 해!” ‘류병우…… 누구더라… 많이 들어 본 이름인…….’ 핫! 하며 고개를 든 태윤의 시야에 호에게 어깨를 붙잡혀 돌아보는 검은 양복의 얼굴이 뛰어들었다. 심각한 얼굴로 호와 이야기를 나누던 검은 양복은 뒤늦게야 호가 우산을 쓰지 않았음을 눈치 채고 미안한 낯으로 들고 있던 우산을 그를 향해 기울였다. 자기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큰 호를 위해 높이 우산을 받쳐 든 사람, 윤지운 검사였다. “윤지운…….” 멍하니 바라보는 동안 이야기가 끝난 듯, 윤지운이 돌아섰다. 그리고 두어 걸음을 걷더니 잊은 걸 두고 온 듯한 몸짓으로 다시 호를 향해 돌아섰다. 무슨 일이지? 하며 두 사람을 지켜보던 태윤은 다음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윤지운이 자신의 우산을 호의 손에 쥐어 준 것이다. 놀란 듯, 호는 거절하려 했지만 윤지운은 고개를 저으며 그에게 뭔가를 이야기했고, 기어이 호의 손에 우산을 쥐어준 채 주차장을 향해 뛰어갔다. 멍하니 달려가는 윤지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호는 다시 태윤을 향해 몸을 돌리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내일까지 조사해! 밥그릇 숫자까지 자세히!” “아, 네!!!!” 무심코 대답한 태윤을 향해 호가 빙긋, 웃었다. 그리고 그대로 청을 빠져나가는 호를 등지고 태윤도 몸을 돌렸다. 류병우… 류병우……. 분명 2주 전에 자살한 변두리 초등학교 교사였다. 유서에 죄를 지은 이 손을 그냥 둘 수 없다는 내용을 남긴 류병우는 사망 나흘 만에 강 하구에서 발견 되었는데, 발견 당시 그의 오른손은 이미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그리고 몸에서 분리 된 그의 오른손은 그의 자취방에서 도끼와 함께 발견되었다. 시체보다 먼저. * 지운은 젖은 머리를 털며 거실 쇼파에 주저앉았다. 습관적으로 리모컨을 찾고 전원을 누르자 순식간에 거실 안은 사람의 말소리로 가득 찼다. 언제나 뉴스 채널로 고정되어 있는 지운의 TV가 단정한 모습의 아나운서를 정면에서 보여준다. 여자는 몇 분 동안 전(前)대통령의 비리 조사와 관련된 여러 이야기들을 떠들어대더니 뒤이어 그간의 사건 사고들을 알리기 시작했다. 강도, 살인, 사고…… 이젠 익숙한 이야기들이 여자의 목소리를 통해 흘러나온다. 그 중에는 오늘 최종검토를 마친 한 목사의 자살건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운은 문득, 자신의 어깨를 붙잡던 투박한 손을 떠올렸다. ‘미안하지만 오늘 약속 없던 걸로 하지.’ 돌아서자마자 그렇게 말하는 남자에게 혹시 방금 전에 있었던 회의의 일에 마음이 상한 거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입을 떼지 못하는 자신을 배려한건지, 남자는 먼저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잠깐 조사 해 볼 일이 있어서. 오해하지 마.’ ‘무슨 오해 말입니까?’ 뻔한 대답을 예상하면서도 물어봤다. 말하자면, 사소한 심술이란 거다. ‘내사와 관련 있는 거냐고 묻고 싶은 얼굴 이길래.’ ‘……죄송합니다. 하지만 내사는,’ ‘불가능하지.’ 자연스럽게 사과하려했지만 남자는 자기 선에서 저지했다. ‘내사는 불가능하지. 나도 알아. 억지였어. 그러니까 그건 신경 쓰지 마.’ 그러면서 엷게 미소 짓는 남자가 우산도 없이 이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눈치 채고 지운은 황급히 자신의 우산을 그를 향해 기울였다. ‘그런데 무슨 조사를 하시려구요?’ ‘뭐, 잠깐. 이것 저것…….’ 혹시 임수호 사건을 사적으로라도 조사할 생각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공적인 위치에서 내사를 허락하지 않은 것으로 자신의 임무는 충분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려면 어떠한가. 이 사람이, 죽은 듯 지내고 있던 호랑이가 드디어 눈을 떴는데. 자신의 구미에 맞는 사건 하나를 찾은 듯 한데 이 정도쯤이야 눈 감아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닌가. ‘좋습니다. 중요할 것도 없는 약속인데 편한 시간으로 미루세요.’ ‘고마워.’ ‘고맙긴요. 그럼…….’ 직장에서는 최대한 사적인 이야기는 금하자는 게 둘 사이의 암묵의 룰이었다. 길게 하고픈 이야기는 삼키고 무거운 발길을 돌리던 지운은 문득 그가 우산을 갖고 있지 않다는 떠올리고 다시 걸음을 돌렸다. 갑자기 돌아선 자신을 보며 놀란 얼굴을 하는 호에게 우산을 쥐어주자 그는 눈을 크게 뜨며 우산을 쥔 채 손을 흔들었다. ‘뭐야? 가져가.’ ‘당신이 가져가세요.’ ‘무슨 소리야. 너도 우산 없잖아.’ ‘주차장까진 금방입니다. 가지고 가세요.’ 자기도 사무실에 우산이 있다고 말하며 한사코 거절하는 남자에게 지운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발 가져가 주세요. 제게도 한번쯤은 당신을 위해서 비를 맞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그리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는 남자에게 억지로 우산을 들게 하고, 도망치듯 주차장으로 달렸다. 아마 모를 거다. 호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그런 소리를 했는지, 죽을 때 까지 모를 거다. 3년 전. 지운은 내리는 비를 보며 하릴없이 한숨만 쉬고 있었다. 사무차 서울 지방 법원에 들려 일을 마친 것 까지는 좋았다. 함께 이야기를 나눈 검사의 사무직 담당 아가씨가 내어 준 맛있는 커피를 한 잔 마시느라 출발 시간을 늦춘 것도 좋았다. 하지만 법원 입구에서 난동을 부리는 남자를 붙잡아 쓰러뜨린 뒤, 뒤늦게 달려온 수위들에게 인수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비를 만났다. 길 하나 건너면 바로 인 곳에 차를 끌고 올 리도 없고, 난데없이 쏟아지는 비에 지운은 당황했다. 그치기를 기다릴까하고도 생각했지만 커피니 뭐니 하며 낭비한 시간이 너무 많았다. 하는 수 없이 달려가자며 서류 가방을 머리 위로 올려드는 순간, ‘윤지운 검사?’ ‘…….’ 잠깐 동안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지운은 제대로 된 인사는 할 생각도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눈앞의 남자를 향해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청까지 가는 겁니까?’ 호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그렇게 물었다. 얼마 전에 막 퇴원 한 남자의 팔에는 하얀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그 붕대 아래의 상처가 새겨진 경위를 떠올리자 지운은 마음 한 구석이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같이 갑시다.’ ‘네?’ ‘우산, 있습니까?’ ‘…….’ 결국 실례를 무릎 쓰고 그의 우산 안으로 들어갔다. 얻어 쓰는 대신에 자신이 우산을 들 생각이었지만 호는 간단하게 거절했다. ‘저보다 키 작은 사람이 드는 거 불편합니다.’ ‘한 형사님 불편하지 않게 높게 들겠습니다….’ ‘다들 처음엔 그렇게 말합니다만, 정신 차려보면 우산이 제 머리에 걸쳐져 있더군요.’ 결국 호가 우산을, 그가 들고 있던 서류를 지운이 든 채 둘은 법원 문을 나섰다. 퇴원은 했지만 아직 왼팔이 부자유스러운 호는 간단한 데스크 업무를 보던 중이었다. 말이 좋아 데스크 업무지, 잔 신부름이나 다름없었다. 오늘도 계장이 부탁한 서류 몇 가지를 떼러 법원에 들렀다고 말하며 좀 더 자신에게 가까이 붙으라고 말하는 호에게 지운은 병원에서 받았던 그의 냉랭한 첫 인상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애초에 편안한 대화는 무리였던 두 사람 사이에서 이런 저런 시덥잖은 대화도 금방 한계에 봉착했다. 한참동안 말 없이 걷던 지운은, ‘검사님.’ ‘예?’ ‘자꾸 그렇게 떨어지면 다 젖습니다.’ ‘아, 예.’ 무뚝뚝한 목소리에 얼른 그의 옆에 달라붙다 시피 다가갔다. 그러나, ‘검사님…….’ ‘예?’ ‘이런 상태라면 굳이 우산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자신은 우산의 바깥쪽에 서 있었다. 호의 한숨소리에 차라리 이대로 청까지 달려가 버릴까 생각하던 지운은 ‘들어요’ 하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불쑥 내밀어진 우산을 엉겁결에 받아들자 호는 지운의 손에 들린 서류를 빼았다시피 든 뒤, 그대로 청까지 달리기 시작했다. 뭐라고 말 할 사이도 없이 빗속으로 사라지는 호의 왼 쪽 어깨는 진즉부터 비로 흥건하게 젖어 던 듯, 붕대를 타고 뚝뚝 빗물마저 흐르고 있었다. 작은 우산 안에 큰 사내 둘은 처음부터 무리였던 것이다. 호가 지운의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건 그 남자의 지독하게 무심한 성격 때문이 아니다. 호에게 지운을 위한 친절은 친절이 아니었다. 그건 그 사람의 생활이었다. 천성 인 것이다. 뉴스는 이제 날씨를 알리고 있었다. 이상기후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며칠째 비가 내리고 있다. 큰 비는 아니지만 연일 촘촘하게 쏟아지는 가느다란 빗줄기도 사람을 지치게 하기는 마찬가지다. 하긴 큰 비였더라면 이런 지루함을 느끼기도 전에 남아나는 게 없었을지도 모르지. 그런 생각을 하며 TV옆의 전화기로 다가가 메시지 확인 버튼을 눌렀다. 급한 연락은 핸드폰으로 오기 때문에 녹음 된 메시지들은 다 시시한 용건 들이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초등학교 동창 하나가 어색한 목소리로 동창회 소식을 전했고 바쁠까봐 핸드폰으로는 연락을 못하겠다는 모친이 가끔 집에도 전화를 하라며 나무라는 기색으로 전화를 끊었다. 어차피 전화 해 봤자 선 보라는 얘기겠지……. 지운이 한숨을 쉬며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머리를 터는 동안 삑- 소리와 함께 메시지는 세 번째로 넘어갔다. 「 …… 」 짧은 침묵. 반사적으로 ‘그 놈’ 이라는 사실을 눈치 챈 지운은 전화기 옆에 바싹 다가갔다. 「 …… 널 봤어… 오늘도 ……더군…. 옆에 있는 그 남자는 누구지…? 마음에 안 들어… 날 두고 너 혼자 …해지는 거야……? 병신…… …게 아냐… ……지 …키, 키히… 키히히히…… 키히!! 」 뚝. 끊어진 목소리와 동시에 침묵이 집안을 엄습한다. 지운은 잠시 후 흘러나온 메시지 녹음 시각을 확인하고 다시 수건으로 머리를 털기 시작했다. * 호는 허리를 굽힌 채 책상 위의 성경을 한 장씩 넘기고 있었다. 얇은 종이는 팔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한 장, 한 장 왼쪽으로 넘어간다. 최종검토가 끝난 오늘, 현장을 정리하기 위해 들른 수사원 두 사람은 경찰수첩만 대뜸 들이밀더니 다짜고자 죽은 목사의 방으로 들어가 책상을 뒤지는 형사를 보며 불쾌한 얼굴로 자기들끼리 눈짓을 주고 받았다. 아랑곳 않고 책상을 뒤지던 호는 그의 책꽂이에서 두툼한 성경 한 권을 꺼내어 한 장씩 넘기기 시작했다. 꼼꼼하게 한 장, 두 장 성경을 넘기길 십여분. 멈칫, 호의 손이 움직임을 멈춘다. 『 18 : 9 』 아무렇게나 찢은 듯 한 손바닥 크기의 종이가 책갈피 마냥 끼워져 있었다. 피로 쓰여 진 숫자는 이미 검게 변색되어 마치 못 박힌 듯 종이에 단단하게 새겨져 있었다. “십팔… 구…….” 중얼거리며 호는 주머니에서 또 한 장의 종이를 꺼냈다. “오…그리고 삼십…….” 역시 손바닥만한 종이에 피로 쓰여 진 글씨. 굳이 감식반에 보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건 죽은 임수호와 류병우의 피다. # 여섯 번째 남자 - 中 눈이 마주쳤다. 그들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나를 에워싼 그림자가 짙어졌다. 나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중요한 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건…… 내가 ‘그 것’을 원한다는 사실이었다. 여섯 번째 남자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재앙이 나를 에워쌌고, 나의 죄가 나를 덮쳤습니다. 눈앞이 캄캄합니다. 나의 죄가 내 머리털보다도 더 많기에, 내가 낙심하였습니다. [시편 40:12] “성명 도준호, 나이 32세. 사인은 질식사. 자세한 내용은 서류를 보면 아시겠지만 잘린 혀가 기도를 막으면서 호흡이 이루어지지 않아 사망 한 것으로 보입니다.” “혀는, 이로 끊은 건가?” “그렇습니다.” “어지간히 독한 놈이구만. 그렇게 죽을 각오로 살지 뭘 자살을…….” “자살이 아닙니다.” 과장이 또 너냐는 식으로 한숨을 쉰다. 검시관을 비롯한 서울지검 강력계 팀원 들은 고개를 떨구고 또 한바탕 휘몰아 칠 폭풍을 예상하며 눈을 감았다. 과장의 곱지 않은 시선을 눈치 챈 건지 만 건지 한 호는 다시 한 번 더 똑똑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준호는 자살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뭐야. 지 혀 물고 죽은 놈이 자살이 아니면, 누가 억지로 물리기라도 했다는 거야?” “검시에 의하면 사망한 도준호의 몸에서 약물 반응이 나왔습니다.” “도준호는 원래 상습적인 수면제 복용자였어. 불면증으로 고생 중 이었다고 기록에도 있잖아! 너도 눈이 있으면 봐!” 슬슬 과장의 성질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나오거나 말거나, 한 호는 무뚝뚝한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사망 당시 도준호의 방에선 반쯤 마신 술병이 나왔습니다. 검시 결과, 도준호는 수면제를 술과 함께 복용한 사실이 드러났구요.” “그거야말로 도준호가 자살했다는 증거 아냐! 죽을 작정 아니었으면 왜 수면제를 술이랑 같이 먹어! 지가 죽을려고 그런 거 아냐! 죽을려고!” “그럼 과장님께 묻습니다. 도준호의 사인은 말린 혀에 의한 질식사입니까, 약물 오용으로 인한 호흡마비입니까.” “야, 한호!!!!” 마침내 인내의 극에 달한 박과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소리를 지른 것 까지는 좋았지만 금세 꼭대기로 치닫는 혈압을 억제 못하고 억, 소리를 내며 의자에 주저앉는 박 진 과장의 폼새는 그야말로 발작 일으킨 황소 개구리다. “사인은 뭡니까?” 부들거리는 박과장을 무시하고 호는 검시관을 향해 물었다. 지목 당한 검시관은 깜짝 놀란 얼굴로 네? 하고 고개를 들더니 아, 예… 하고 서류를 들추며 말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질식사입니다.” “교묘하군요.” 호의 비아냥에 검시관의 얼굴이 붉어졌다. 구체적인 서술 없이 호흡 마비마저도 포함하는 '질식사' 라는 단어를 선택해서 썼음을 꼬집은 것이다. “야, 한 호…… 도준호는 자살했어. 직장도 없이 고등학교 졸업하고 몇 년을 놈팽이로 지내다가 이런 나도 싫고 세상도 싫다고 자살한거란 말이야. 알겠어? 그 놈은 유산이 없어서 유산 상속을 노린 존속살해도 성립이 안 되고, 보험에 든 게 없어서 보험금을 노린 계획범행도 말이 안 돼. 거기다,” “거기다, 지난 주에 죽은 임수호 목사와 친구였죠.” “뭐……?” 순식간에 회의장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한 호는 테이블에 놓인 서류 봉투에서 여러 묶음의 서류를 꺼내어 과장 이하, 팀원들에게 던지다시피 나누어줬다. “뿐만 아닙니다. 임수호와 도준호, 그리고 3주전에 죽은 류병우. 세 사람은 모두 한 때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회의실은 거의 경악에 가까운 술렁거림에 뒤덮였다. 사람들은 호가 준비한 서류를 보며 저마다 한 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야…… 이거 류병우랑 도준호 둘이는 아예 옆집이었네. 임수호는 바로 옆 동이었고….”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아, 시끄러워! 여기가 무슨 돗대기 시장이야! 조용히들 못해!!!” 잠깐의 술렁임이 혈압 오른 개구리에 의해 단번에 진압되었고, 개구리는 잡아먹을 듯 한 눈빛으로 호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그 셋이 한 동네에 살았던 적이 있는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자네가 준비한 그 잘난 서류에 보니까, 응? 셋이 같은 동네에 살았던 기간이라고 해 봐야 겨우 일년인데. 그 일년 동안 친하면 얼마나 친했겠어? 그나마도 도준호랑 임수호는 각각 다른 고등학교 재학 중이었고, 류병우는 아예 중학생이었는데. 한 동네라는 것 말고 얘네가 접점이 어디있어! 도대체!!!” 과장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나중에는 아예 사람을 잡으려는 듯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말해 봐! 니가 이 세 명을 한 데 묶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우기는 이유! 근거!” 너 봐라, 이눔 자식. 말도 안 되는 서류뭉치를 들고 와서 대뜸 세 놈이 친구라고? 어디, 그렇게 생각한 이유나 들어보자. 대신, 못 대면 넌 죽음이야. ― 라고 개구리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교회입니다.” “…… 뭣?” 호는 딱 부러지는 말투로 대답했다. “교회입니다. 죽은 류병우, 임수호, 도준호 세 사람은 약 일 년 간, 같은 동네라고도 할 수 있는 근접한 거리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년 동안 학교도, 나이도 다른 세 사람은 매주 주말이면 교회에서 서로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 황소개구리 마저 입을 다물고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노려보자 회의실은 다시 쥐죽은 듯한 고요함에 빠져들었다. 그 때, “한 형사께서…….” 언제 왔는지 소리도 없이 회의실로 들어온 윤지운이 호가 나눠준 서류 한 장을 들고 서서 말했다. “한 형사께서 세 사람의 죽음을 단순한 자살로 보지 않는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겠지요.” “물론입니다.” “말씀하십시오.” 지운의 말이 떨어지자 호는 부스럭거리며 서류봉투에서 또 다른 종이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지금 이 세 장의 종이는 자살한 세 사람의 방에서 나온 종이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의 방에 있던 성경책 사이에 책갈피처럼 꽂혀있던 종이들입니다. 크기는 보시다시피 보통 어른의 손바닥 크기 만 합니다. 칼이나 가위 등으로 잘린 것이 아니라 손으로 찢은 종이입니다. 그리고 여기 적힌 이 숫자.” 호가 종이를 회전 시키자 검붉은 색의 숫자가 튀어나왔다. 회의실 안은 일순 얼어붙었다. 누가 보아도 피로 쓴 것임에 확연한 저 숫자. “오 대 삼십(5:30). 죽은 류병우의 방에서 나온 종이입니다. 감식반에 확인 결과 류병우의 피로 쓰인 글씨가 확실하며, 혈액의 상태로 보아 당시 류병우의 오른손 절단면에서 흘러나온 피가 확실합니다. 그럼 여기서 질문 드립니다. 류병우가 도끼로 내려친 손은 오른손입니다. 손이 떨어져 나가고, 그 절단면에서 흘러나온 피로 썼다고 하는 이 글씨. 그렇다면 류병우는 왼손으로 글을 썼을까요? 오른손잡이임에 틀림없는 류병우가 교사로 재직 할 당시에 수업 중에 장난처럼 끄적였다는 왼손의 필적을 확인했습니다. 여느 오른손잡이가 그렇듯, 그의 왼손 글씨는 글씨라기보다는 그림에 가까웠습니다. 아무리 숫자라고 한 들, 이렇게 반듯한 글씨가 가능할까요? 아닙니다. 이건 류병우의 왼손 글씨가 아닙니다. 그의 잘려나간 오른손이 쓴 글씨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건, 과연 누구의 손이 쓴 숫자일까요.” 호는 쉬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이건 류병우 사건 일주일 후에 죽은 임수호 목사의 방에서 찾은 종이입니다. 그의 책상에 꽂혀있던 성경책에서 나온 종이입니다. 적혀있는 숫자는 십팔 대 구. 여기서 잠깐 질문 드립니다. 성경책에, 마치 책갈피처럼 꽂혀있던 종이. 그리고 거기에 적힌 숫자. 과연 이 숫자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침묵 가운데 윤지운이 입을 열었다. “성경 구절이군요.” “정답입니다. 아니,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호는 태윤에게 맡겨 두었던 성경책 한 권을 받아들었다. “종이는 정확히 이 페이지에서 발견했습니다.” 그가 펼쳐든 페이지에는 ‘마태오의 복음서’ 라는 조금 큰 글씨가 새로운 장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마태오의 18장 9절을 찾아보았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호는 낮은 똑똑한 목소리로 마태오의 18장 9 절을 읽어나갔다.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빼어서 던져 버려라. 네가 두 눈을 가지고 불타는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 눈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또 네 오른손이 너로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 “류병우…….” “주님은, 간사한 모든 입술과 큰소리치는 모든 혀를 끊으실 것이다.” “그건 도준호.” “……하느님은 잔인하군요.” 지운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며 내려둔 종이에는 각각 세 개의 성경구절이 적혀 있었다. “하느님이 잔인 한 건지, 사람이 잔인 한 건지. 성경도 결국엔 사람이 쓴 책 아닌가.” “그거야… 하느님이 붓을 들고 썼을 리는 없으니까요.” 그건 나름대로 또 웃긴 꼴이라고 생각하며 호는 입을 열었다. “혹시 성경에서 제일 잔인한 부분이 어딘지 알아?” “전 무교입니다.” 알아. 하고 호는 대꾸했다. “혹시 넌센스인가요?” “응?” “그거, 종교인들이 자주 하는 농담이잖아요. 성서에서 가장 잔인한 부분. 보통 열 가지 재앙이 내린 출애굽을 말하지만 정답은 에페소지요.” “에페소?” “정확히는 에페소서.”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는 호에게 지운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애를 패라고 하잖아요.” 한 참 만에 그 뜻을 이해한 호가 어이없다는 웃음을 터뜨렸다. “너는 정말…….” “제가 만든 농담이 아닙니다. 들은 이야기예요.” “누가 그런 재미도 없는 농담을 해?” 잠시 생각을 하던 지운이 '부모님 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모님?” “부모님 두 분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죠.” “아… 그랬군.” “네, 뭐.”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깐 뭔가를 생각하는 얼굴을 한다. 그러더니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맥주 드릴까요? 하고 묻는 지운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날씬한 몸은 쇼파를 떠나 천천히 주방으로 향한다. 무심코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호는 저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흰 와이셔츠에 정장 바지라는 심플한 차림의 남자의 뒷모습은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가히 절경이구나…… 하고 속으로 한숨을 쉬다가 문득 자신의 지극히 아저씨스러운 추태를 눈치 채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다. “무슨 생각 하시는 겁니까?” “어?” “여기 와서까지 일 생각인가…….” 테이블 위에 맥주 캔을 내려놓으며 지운이 못 마땅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이. 일부러 성경 구절이 프린트 된 종이까지 들고 온 건 너야.” 당황한 호가 서둘러 서로의 입장을 확인시켜 줬다. 물론 사건에 대해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먼저 성경 구절을 읊으며 골치 아픈 얼굴을 하던 게 누군데, 하고 생각하자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었던 거다. “저야… 한 형사님 가시면 혼자서 조사 해 볼 생각으로…….” “과연 부장 검사님, 착실하시군요.” 감탄했다는 듯, 호가 한숨을 섞어 말하자 뭐라고 말을 하려던 지운이 입을 다물었다. “…… 그만두시죠. 그런 호칭은.” “검사님도 절 한 형사님이라고 부르잖습니까.” 작정을 했는지 호는 능글대지도 않고 침착하게 지운에게 반박했다. 정확히는 반박을 가장한 놀림이었다. “저는 계속 한 형사님이라고 불러왔습니다…….” “저도 계속 윤 검사님이라고 불러온 걸로 기억합니다만.” 정색을 하고 존대를 하자 지운은 금세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 되었다. 안경 너머의 눈에는 이미 가득 곤혹이 담겨져 있고 가늘지만 단단한 손가락은 차분하게 빗어 넘긴 앞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고 있었다. “…… 부르기로….” “뭐라구요?” “…… 이름을… 부르기로….” “잘 안 들립니다. 죄송하지만 똑똑하게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던 지운이 내던지듯 “됐습니다” 하고 말하더니 테이블 위의 캔을 집어 들었다.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캔을 따고, 입구에 입을 대는 순간, “!!” 강한 힘이 손목을 붙잡는다. 그대로 끌어당겨지는 바람에 흘러넘친 맥주가 턱은 물론 셔츠까지도 적셨지만 상대방은 아랑곳 않고 입술을 겹쳤다. 느닷없는 입맞춤에 당황한 듯 맥주를 쥔 지운의 손이 허공을 가로젓다 이내 상대방의 등을 껴안았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뜨거운 혀가 입 안을 휘젓고 역시 누구의 것인지도 타액이 흥건하게 입 안을 적신다. 젖은 소리가 음란하게 공기를 뜨겁게 데우고, 붙잡힌 손목이 저려 올 정도로 남자는 강하게 자신을 끌어안았다. “응…… 자, 잠… 음…, …….” 뭔가를 말하려던 목소리는 잡아먹을 듯 한 키스에 삼켜져 결국 이어지는 젖은 혀의 얽힘에 숨이 턱에까지 찬 지운은 궁여지책으로 들고 있던 맥주를 남자의 등 위에 쏟았다. “윽!”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화들짝 놀란 호가 지운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손을 떼고 맥주가 흐르는 자신의 등을 더듬으며 지운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에는 '이게 무슨 짓?' 의 의미가 강하게 나타나 있었지만, “입술 다쳤잖아요.” 남자는 오히려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입술…….” “위험합니다. 잘못하면 크게 베인다구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입술을 긁자 금세 붉은 피가 묻어나온다. “많이 다쳤어?” 짐짓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지만 상대방은 고개만 저을 뿐이다. “어이…….” “…….” “윤 검사.” “…….” 대답은커녕 들은 체도 않는 지운을 보며 그제야 호는 그가 심술을 부리는 중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좀 더 모른 체 하고 시치미를 떼어 볼까도 했지만 그러기엔 너무나 조급한 상황이다. 결국 지운아, 하고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남자는 심드렁한 얼굴로 자신을 돌아봤다. “많이 다쳤냐고.” “별로요.” 아직 완전히 기분이 풀어진 건 아닌 듯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새침한 얼굴로 눈을 반쯤 내리깔고 계속 긁힌 입술을 매만지는 모습에 호는 거의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결국 마음이 풀릴 때 까지, 열심히 숙이고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에 바짝 옆으로 다가갔다. “그렇게 시치미 떼고 있어 봐야…….” ‘시치미’ 라는 단어에 불쾌한 빛이 떠오른 것도 잠깐, “더 귀여워.” “…….” 이내 풋, 하는 웃음이 그의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정말 많이 다친 건 아니지?” 진심으로 걱정이 되어 묻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건 핥으면 금방 나아.” 상처가 난 부위가 입술이라는 사실도 잊고 호는 버릇처럼 말했다. 피식 웃음을 흘린 지운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그 기세 그대로 호의 무릎 위에 주저앉았다. 놀란 호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은 지운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디, 제대로 핥아 봐 주시죠.” * 두 번째 메시지입니다. 삐 ― 「 창부…… 너부터……까… 」 시월, 일일, 수요일, 오전 다섯 시 십일 분 , 에 녹음되었습니다. 』 세 번째 메시지입니다. 삑― 「 세 명 죽었다. 그럼 남은 건……? 」 구월, 이십팔 일, 일요일 오후 여섯 시 사십 이 분, 에 녹음되었습니다. 』 네 번째 메시지입니다. 삑― 「 …… 봤어… 오늘도 ……더군… 옆에 있는 그 남자는 누구지…? 마음에 안 들어… 날 두고 너 혼자 …해지는 거야……? 병신…… …게 아냐… ……지 …키, 키히… 키히히히…… 키히!! 」 구월, 이십육 일, 금요일, 오후 여섯 시 이십구 분, 에 녹음되었습니다. 』 다섯 번째 메시지입니다. 삑― 「 … 써 두 명……었다… ……로 그 놈 눈알을…… 피가 철철…… 서 키힛! 살려 … 빌었는데…… 용서 못 해…… 그 …도… 너도 …… 」 구월, 이십일 일, 일요일 오후 열 한 시 정각, 에 녹음되었습니다. 』 여섯 번째 메시지입니다. 삑― 「 병신… 왜 …지 않지? 어서 말해… 그 … 사… 에게 도와 달…… 해… 무섭지…… 나는 다 알…… 울고 있지……? …니? …거야? 키키키! 병신!! 」 구월 십오 일, 월요일 오전 한 시 칠 분, 에 녹음되었습니다. 』 일곱 번째 메시지입니다. 삑― 「 … 죽였어… 드디어…… 가 시작……지. ……도 기쁘지……? …는 다 알고 있다… …은 잘라 버렸…… 발버둥 치……… 이제 시작이야…… 」 구월 십 사 일, 일요일, 오후 세 시 사십육 분, 에 녹음되었습니다. 』 여덟 번째 메시지입니다. 삑― 「 창부. 」 팔월, 십 칠 일, 일요일, 오전 영 시 십오 분, 에 녹음되었습니다. 더 이상 녹음 된 메시지가 없…… 』 꾹,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에 녹음된 여자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지운은 지친 얼굴로 쇼파에 주저앉았다. 첫 번째 메시지가 도착 한 건 8월. 정확히는 17일 이었다. 굳이 메시지를 다시 확인하지 않아도 기억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날 처음으로 호와 살을 섞었기 때문이다. 스물다섯에 만나 단순한 검찰청의 검사와 형사의 구도에 서 있기를 몇 년, 올해 봄에야 비로소 서로의 마음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신이 집어넣은 죄수에 의해 부인과 어린 아들을 잃은 사람. 허전한 마음을, 빈틈을 노리고 교묘하게 파고들었다는 점을 부인 할 생각은 없다. 자신의 그러한 행동이 나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행동이 나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따금 가슴을 파고드는 죄의식에 지운은 숨이 막혔다. 그럴 때 마다 당신들로 인해 상처받은 마음을, 내가 치료해 주는 거라고 우겼다. 당신들의 죽음으로 바닥까지 쓰러진 사람을, 내가 다시 일으켜주는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죽은 부인과 아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차피 죽은 사람이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못한다. 기껏해야 꿈속에 나타나 괴롭히는 일 밖에는. 살아있는 자신은 그를 사랑 해 줄 수 있다. 아껴 줄 수 있고, 그 상처에 혀를 대고 핥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간신히 다시 피어난 이 미소를 지켜 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쓰러질 틈을 주지 않는 것. 그러기 위해선, 자신이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지운은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깊지 않았던 상처는 한달이 채 되지 않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꼼짝 하지 마!!! 움직이면 이 새끼는 죽어!’ ‘…….’ ‘총을 버려.’ ‘…….’ ‘버려!!!’ 꾸욱, 칼끝이 목을 파고든다. 고통보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숨이 막힌 지운의 눈에 말없이 총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호가 들어왔다. ‘뒤로 돌아!’ ‘…….’ ‘얼른! 제대로 안 하면…!’ ‘죽여 봐야 니 죄밖에 더 커져?’ 호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뭐……?’ ‘죽이면, 그 상황에서 인질의 가치는 제로다. 하지만 네 죄는 플러스지. 하여간 인질이랍시고 붙들고 개기는 놈들 보면, 죄다 멍청하다니까. 그렇게 붙잡고 미적거릴 시간에 도망이나 갈 것이지.’ 지운은 자신의 목에 칼을 대고 있는 남자가 떨고 있다는 걸 눈치 챘다. 범인이 맞은편에 선 형사의 호언에 겁을 먹었음을 깨달은 지금 이 순간이 빠져나오기 가장 좋은 때라는 것도 알았지만 굳어버린 몸이 움직여주지 않았다. 덕분에 호가 몇 번이나 건넨 사인도 놓치고 석상마냥 뻣뻣하게 붙잡혀 있었다. 그리고, ‘까불지 마! 그렇게 말하면 누가 놓아 줄 줄 알아!! 제기랄, 바보 취급 했겠다! 이런 녀석 따위!!!’ ‘조심해!!!’ 섬뜩한 감촉이 좀 더 깊숙하게 목 안을 파고든다고 생각하는 순간, 강한 충격이 치달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을 붙잡고 있던 범인과 형사는 하나로 뭉쳐져 난투전을 벌이고 있었다. 칼을 든 범인 밑에 깔린 형사가 위험하다고 느낀 지운의 눈에 멀리 바닥에 떨어진 그의 권총이 보였다. 눈치 채지 못하게 다가가 총을 집어 들었다. 안전장치를 풀고 범인의 팔을 조준했다. 하지만 떨리는 손목을 움켜쥐고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적과 아군의 위치가 바뀌었다. - 탕!!! 높은 포성과 함께 범인의 위에 올라탄 형사가 비명을 질렀다. ‘이 멍청이! 누굴 쏘는 거야!!!’ 지금 생각해도 부끄러운 사건이다. 당시에 지운은 전적을 세우려는 욕심에 범인을 쫓다가 되려 인질로 붙잡혔다.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동료 형사를 쏘아 다치게 만들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내내 이제 나는 여기서 끝이구나 하며 무거운 걸음으로 청에 들어간 지운은 의외의 환대에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장하다며 어깨를 두드리는 차장검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사건의 전말은 말 그대로 ‘거짓’ 이었는데 더욱 기가 막힌 건 그 ‘거짓’을 보고 한 사람이 다름 아닌 한 호 라는 사실이었다. 놀란 가슴으로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사실대로 보고하겠다는 말도,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도 기각되었다. 시종 귀찮다는 얼굴로 창 밖을 바라보던 사람. 그 때는 몰랐다. 그 무뚝뚝한 사람과 이런 사이가 될 줄은. “…….” 지운은 고개를 들어 거실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다. 벌써 다섯 시 삼십분을 향해 달려가는 시계 바늘이었지만 창 밖은 어두웠다. 지운으로서는 드물게 시도한 대담한 유혹이었다. 무릎에 걸터앉아 목을 껴안고 핥아 달라, 고 하자 남자는 물어뜯을 기세로 입술을 부딪혀왔다. 처음 몸을 겹치던 그 여름과는 모든 게 달랐다. 수줍던 키스도, 부드러운 애무도 없었다. 본능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본능에 지배된, 마치 짐승처럼 엉켜서 서로의 몸에 입을 맞추었다. 그 뜨거운 피부에 직접 닿는데 방해가 되는 옷들을 벗는 동안에도 호는 잠시도 지운을 놓아주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과 터질 듯 달아오른 흥분에 셔츠의 단추를 푸는 손가락이 몇 번이나 미끄러졌다. 결국 마지막 단추 하나는 우악스러운 호의 손에 튿어 져 나가고, 흰 셔츠는 종잇장처럼 구겨져 바닥에 던져졌다. 철컥거리며 벨트의 버클을 당기는 동안 벌써 단단하게 부푼 성기는 바지 천을 사이에 두고 호의 손 안에서 희롱당하고 있었다. “잠시만, 옷…, 지금 벗을 테니까….” 그리고 벨트가 헐거워짐과 동시에 속옷 째 끌어내린 호가 발기한 지운의 페니스를 입에 물었다. “훗…… 자, 잠깐… 아직 씨, 씻지도 못…… 아아….” “나중에 씻어.” 나중에? 나중에 언제요? 머릿속으로 떠오른 항변의 말도 곧 하얗게 지워졌다. 허리를 깊게 숙인 채 열심히 지운의 성기를 애무하던 호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쇼파위로 올라와.” 고개를 끄덕이고 덜덜 떨리는 몸을 추슬러 쇼파 위에 길게 누웠다. 머리를 대기가 무섭게 두 다리가 번쩍 들어 올려지더니 휘익, 몸이 경이로운 각도로 굽혀진다. “아…….” 다시 뜨거운 열에 감싸이고, 손을 뻗어 호의 머리를 감싸안은 지운은 달콤한 비음을 흘리며 어깨를 떨었다. 츕츕거리는 소리가 바로 아래에서 들리고 있었다. 부끄럽다거나 수치스럽다는 생각 따윈 이미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오로지 더 깊은 쾌락만을 갈구하며 지운은 고개를 젖히고 신음을 내질렀다. “나, 나올 것 같…….” 떨리는 목소리에 남자가 고개를 들더니 손가락으로 마사지 하듯 페니스를 주무른다. 금방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성기의 끝에서 끈적거리는 점액질의 액체를 흘러나오고, 흘러나온 액체는 호의 손바닥으로, 그리고 다시 지운의 엉덩이 쪽으로 이동했다. 삽입의 전조(前兆)에 “…… 그걸로 쓰는 겁니까?” 지운이 고개를 들고 헐떡거리는 음성으로 묻자 호가 싫어? 하고 반문한다. “그 것 만으론 뻑뻑해서…….” “잘 넓힐게.” 그리고 손가락이 들어왔다. 잘 넓히겠다는 말 그대로 호는 정성을 다해 입구를 열었다. 천천히 근육을 풀어주며 손가락의 개수를 넓혀나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깊은 곳에는 전혀 닿지 않으려는 그 손길에 지운은 애가 타기 시작했다. “응… 으,읏… 하아…… ㅅ!” 아무리 요염한 신음을 흘려도 남자는 참을성 있게 입구만을 주물렀다. 마치 주름 하나, 하나를 더듬으려는 듯 차분하고 진득한 손놀림에 결국 지운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재촉했다. “그만해요… 그 정도면 충분하니까, 빨리…….” “괜찮겠어?” 이미 백 년 전부터 괜찮았다고 소리 지르고 싶은 걸 참고, 지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빙글거리며 페니스 끝을 입구에 묻는 남자를 보며 지운은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어쩔 줄 몰라 하던 자신들의 모습을 떠올리고 소리 없이 웃었다. 8월. 한 여름이지만 낮은 온도로 설정된 에어컨디셔너의 바람에 실내는 냉랭한 기운마저 감돌고 있었다. 그래도 주먹 쥔 손은 흥건하게 땀으로 젖어 있었고, 키스 하는 내내, 지운은 숨을 어떻게 쉬어야 할지 몰라 곤란해 했다. 태어나서 벌써 몇 번이나 키스를 했는지 모른다. 호와의 키스도 처음은 아니다. 그해 봄, 사귀기 시작한 이래 제법 자주 두 사람은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평소의 키스와는 달랐다. 이건 전위(前爲)다, 라는 걸 두 사람은 모두 알고 있었다. 유난히 섹스의 진한 향기를 풍기는 그 키스. 지금부터 우리는 살을 섞을 거다. 그가 내 안으로 들어 올 것이며, 그러한 그를 나는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떨렸다. 심장은 미친 듯이 고동쳤으며 잔뜩 고조된 긴장감에 지운은 차라리 울고 싶었다. 흔한 표현이지만, 폭풍 같은 밤이었다. 하지만 행복했고, 당장 죽어도 좋다고 몇 번이나 되뇌일 만큼 아득한 쾌락으로 자신은 추락과 상승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 날, 처음으로 메시지를 받았다. 자고 가라는 지운의 말에도 불구하고 호는 현관을 나섰다. ‘내일 아침에 무슨 얼굴로 봐야할지 모르겠다.’ 는 게 핑계였다. 어차피 집으로 돌아가도 직장에서는 또 얼굴을 맞대어야한다. 그렇게 말해도 호는 돌아가겠다고 했다. 서운하다고 울며 매달리는 성격도 아니고, 지운은 바래다주겠다며 함께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 건물 입구에서 인사를 나눴다. 어두운 밤공기 속으로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지운은 발걸음을 돌렸다. 방금 자신과 호가 내린 엘리베이터에 올라 14층을 누르고 벽에 기대어 서자, 갑작스레 나른한 둔통과 피곤이 몰려와 지운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짧은 순간동안 잠깐 졸았나싶더니 어느새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는 14층에 도착했다. 잠그지 않은 현관문을 그대로 열고 들어가는 지운의 눈에 깜박거리는 붉은 빛이 들어왔다. 그 사이에 전화가 왔었나보다 하며 메시지 확인 버튼을 누르자 낮고 허스키한 남자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 창부 」 그 후로도 호와 섹스 할 때 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는 음산한 목소리로 메시지를 남겼다. 입에 담을 수 없는 추잡한 욕을 하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중얼거림과 소름 끼치는 협박의 메시지를 남겼다. 처음 한 동안은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였다. 남자에게 달라붙는 스토커라니, 들어본 적도 없다고 진저리를 쳤지만 남자와 섹스를 하는 남자도 있는데 남자를 스토킹 하는 남자가 없을 리는 만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기분 나쁜 메시지도, 호의 가슴에 안겨있는 순간의 평온함을 깨뜨릴 수는 없었다. 께름칙한 목소리 따위는 겹쳐진 심장의 고동으로 지우고, 불안한 만큼 더욱 강한 힘으로 매달렸다. 그럴 때 마다 어김없이 메시지는 녹음되었지만 지운은 듣지도 않고 삭제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메시지가 도착했다. 「 … 죽였어… 드디어…… 가 시작……지. ……도 기쁘지……? …는 다 알고 있다… …은 잘라 버렸…… 발버둥 치……… 이제 시작이야…… 」 평소의 ‘죽여 버릴 거야, 죽어’ 와 같은 협박성의 메시지가 아니었다. ‘죽였다’라는 확실한 장담성의 말투에 지운은 그 메시지를 보관하기로 했다. 물론 장난임이 확인 된 순간 지울 생각이었지만 만에 하나 이 메시지와 관련한 사건이 일어 날 경우, 이건 중요한 증거 자료가 된다. 보관 버튼을 누르며 지운은 부디, 부디 이 음침한 남자의 목소리가 증거 자료로 법정에 제출 될 일이 없기만을 기도했다. 그리고 다음 날, 실종된 류병우의 방에서 도끼로 잘린 그의 오른손이 발견 되었다. 수색 작업과 탐문 수사를 벌이고 여러 가지 보고서를 받고, 검토하느라 한밤중이 되어서야 청을 나선 지운은 가물거리는 정신으로 차를 몰고 집으로 갔다. 현관문을 열고 이미 익숙해진, 자신을 반기는 전화기의 빨간 불빛에 홀린 듯 확인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흘러나온 남자의 목소리에, 지운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 병신… 왜 말하지 않지? 어서 말해… 내가 죽였다고 말해… 그 형사에게 도와 달라고 해… 무섭지……? 나는 다 알아… 지금 울고 있지……? 오줌이라도 쌌니……? 그런 거야…? 키키키! 병신!! 」 * “너는 내 눈앞에서 네 언니의 모습을 닮아 갔다. 네 언니가 마신 잔을 네 손에도 들려주리라.” 남자가 조용한 음성으로 종이의 구절을 읊는다. “어디 나온 구절인지 알겠어?” “에스겔(Ezekiel)입니다.” “에스겔…….” 젊은 남자가 돌려주는 종이를 건네받으며 호는 그 발음을 입으로 되새겼다. 지난 주 일요일, 네 번째 남자가 죽었다. 이름은 윤상재. 나이는 서른다섯으로 그는 앞서 죽은 세 명과는 다소 먼 거리의 동네에 살았다. 하지만 무려 6 년 동안이나 그 교회를 다닌 기록을 가진 남자였다. 죽은 윤상재는 입이 뭉개져있었고, 양손가락이 모두 잘려나갔다. 어디를 봐도 자살의 흔적 따위는 찾을 수 없었다. 조잡한 유서와 억지스러운 사인을 포기하고, 놈은 공공연하게 ‘살해’를 하기 시작했다. 호는 살인 현장에서 가장 먼저 윤상재의 성경책을 뒤졌지만 찾고자 하는 종이는 없었다. 아예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수를 쓴 건가, 하고 고민하기도 전에, 수사원 하나가 큰 소리로 외쳤다. “시체 입속에 뭔가가 있습니다!!!” 그리고 꺼내어 호의 손으로 넘겨진 것은 작게 접힌 손바닥 크기의 종이로 펼쳐보이자 선연한 붉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 너는 내 눈앞에서 네 언니의 모습을 닮아 갔다. 네 언니가 마신 잔을 네 손에도 들려주리라 > 단지 그 문장으로는 녀석이 하고자하는 말의 의미를 알 수가 없어 결국 다시 눈앞의 남자를 찾아 왔다. 남자의 이름은 정경준. 특별수사 제 1부, 범죄정보과에 근무 중인 경찰이었다. 직위는 경위. 호와 같은 경찰학교를 졸업한 경준은 자신의 직위가 더 높음에도 불구하고 꼬박 꼬박 호에게 존대를 했다. 직장 상사이기 이전에, 대학의 후배이기 때문이다. 역시 호보다 직위가 높은 태윤이 호를 꼬박꼬박 선배라고 부르며 존대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었다. 아무튼 이 젊은이는 이미 류병우의 성경책에서 나온 5장 30절의 수수께끼를 풀 때, 한 번 도움을 받았다. 임수호와 도준호의 경우 종이는 각각 마태오와 시편의 첫 장에서 발견되어 어렵지 않게 숫자의 비밀을 풀 수 있었다. 하지만 류병우의 경우 페이지 확인하기도 전에 종이는 책에서 떨어졌고 결국 5:20이라는 숫자만을 가지고 범인이 남긴 메시지를 확인해야 했던 강력계 팀원들은 어디 가까운 교회의 목사라도 찾아가야겠거니 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 때 태윤이 범정과에 목사님이 한 분 계신다며 호에게 소개시켜드릴까요? 하고 말했고 밑져봐야 본전이라고 태윤을 따라간 호는, 그곳에서 정경준을 소개받았다. 과연 ‘목사님’ 답게, 점심식사를 마친 그는 그날도 진지한 얼굴로 성경을 읽고 있었는데 태윤이 어깨를 칠 때 까지 고개도 들지 않았다. 건방진 녀석이 사람이 오는 기색이 느껴지면 얼른 아는 척을 해야 할 것 아니냐고 생각한 호였지만 ‘아, 김 경장님’ 하며 귀에서 뽑아낸 귀마개에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알지? 전설의 한 호 선배님이시다.” ‘전설의’ 라는 미사여구도, ‘그게 뭐’ 라는 무뚝뚝한 경준의 표정도 마음에 들지 않은 호는 대뜸 그 숫자를 들이밀었고 ‘무슨 구절인지 알겠어?’ 하는 호의 물음에 경준은 표정 없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었다. “성경이 신, 구약을 합해서 모두 몇 권이나 있는 줄 아십니까? 66권입니다. 그리고 그 66권 안에는 5장 30절이라는 구절이 적어도 50개는 있을 겁니다.” 멋쩍은 얼굴로 기다려라, 고 한 호가 도준호와 임수호의 사건에서 찾아낸 두 개의 구절을 보여주자 그제야 정경준은 ‘그렇다면 마태복음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마태복음?” “네. 도준호의 경우 시편 12장 3절이었죠. 그는 혀를 잘렸구요. 눈을 찔린 임수호는 마태 18장 9절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손을 자르거나 찍으라는 구절이 나오는건 신명기와 마태, 둘 뿐입니다. 그 중에 신명기는 25장에 그 여인의 손을 잘라버리라는 구절이 나오구요. 그럼 남은건 마태 하나인데,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마태 5장 30절이 바로 이 내용입니다. ‘또 네 오른손이 너로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 목사가 되려했으나 집안의 반대로 결국 공직자의 길을 택했다는 경준은 아무래도 성경을 통째로 외운 듯 했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호는 ‘그 친구 어때요?’ 라는 태윤의 물음에 ‘그런 집요한 놈이 뭐가 되는 줄 알아? 스토커야 스토커’ 하고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리고 오늘, “스토커에게 뭘 또 물어보러 오신겁니까.” 무뚝뚝한 얼굴로 자신을 맞는 경준을 보며 호는 태윤을 조지리라 다짐했다. 그래도 결국 이번에도 역시 경준의 그 집요함에 도움을 받았다. 사실 호는 경준이 불편했다. 그 무뚝뚝한 표정과 애교없는 말투가 조금 부담스러웠다. 사내 자식이 점잖지 못하고 살살거리는 것도 싫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태도도 거북하다. 오늘도 책상에 앉은 채 차라리 윤검사에게 부탁할까 하고 중얼거리자니 태윤이‘윤지운 검사 말씀이세요? 기독교 였습니까?’하고 눈을 크게 뜨고 물어왔다. “아니. 부모님이 독실한 기독교래. 본인은 무교.” “아아…… 그냥 간단하게 해결하자구요, 한 선배.” 결국 그렇게 등을 떠밀려 다시 범정과에 발을 들였다. 스토커 건이야 어찌되었던 처음 경준을 만났거도 태윤의 덕, 오늘의 골치 아픈 성경 풀이도 태윤이 등을 밀어준 덕에 쉽게 해결 될 전망이다. 그 기특함을 생각해서라도 태윤을 용서하기로 마음먹은 호는본격적인 질문을 시작했다. “그래, 그런데 이 구절이 정확히는 뭘 뜻하는 거지?” “이건…… 오홀라와 오홀리바라는 자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뭔가를 더 얘기하려던 입을 다물고, 경준은 책꽂이에 꽂힌 제 성경 중 한 권을 뽑아들고 페이지를 넘긴 뒤 메모지 한 장을 그 사이에 끼웠다. “여기 표시 해 두었습니다. 설명 드리는 것 보다 직접 읽어보시는 게 좋겠군요.” 무표정하게 내미는 성경책을 받아들던 호의 머릿속에 며칠전의 넌센스 퀴즈가 생각났다. 과연 이 녀석은 그 농담을 알까, 몰랐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눈 앞의 포커페이스가 무너지는 상상을 하며 조금 들뜬 목소리로 호가 물었다. “혹시 성경에서 제일 잔인한 부분이 어딘지 아나?” “네?” 경준이 예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눈만 조금 더 크게 뜬 채 반문한다. “에페소서라고 하더군.” “네에?” 아까보다 더 딱딱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경준에게 당황한 호가 할 말을 잃고 버벅거렸다. “그러니까… 애를 패라는…….” “무슨 말씀이신지……?” 경준의 표정이 자칫 불쾌함으로 넘어갈 수 있음을 눈치 챈 호는결국 한숨과 함께 말했다. “자주 하는 농담이라고 하던데. 보통 성서에서 가장 잔인한 부분이라고 하면 무슨 재앙이 내린 어느 부분을 말하지만 그 퀴즈의 정답은 에페소서 라고. 그러니까, 일종의 말장난이지. 애를 패소서- 라고…….” “아아… 에베소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엉?” 이번엔 호의 눈이 둥그래졌다. “기독교에서는 '에베소' 라고 합니다. 에페소, 라고 말을 하는 건 천주교 뿐이지요.” “아아…… 그런거야?” “네. 같은 성경이라도 천주교와 기독교 사이에는 이렇게 발음이나 번역의 차이가 조금씩 나지요. 아마 그 농담을 알려주신 분은 천주교 신자이신 듯 합니다. 에페소, 라는 번역은 공동번역 성서에만 나오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공동번역 성서는 천주교 신자들만 사용하지요. 기독교 신자는 개역 한글판이나 표준 새 번역 성경을 씁니다.” “아, 그래서…….” “네. 재미있는 농담이지만 이렇게 엉뚱한 차이가 벌어지기도 하는군요. 어쩌면… 이게 바로 우리나라 천주교와 기독교의 현 주소 일지도 모르지요.” 조금 씁쓸한 얼굴로 책상을 향해 의자를 돌리던 경준이 잠깐 미간을 좁히며 다시 의자를 돌렸다. “그 종이, 다시 줘 보시겠습니까?” “종이? 아, 이거?” 주머니에 넣었던 종이를 건네주자 받아든 경준은 심각한 얼굴로 종이를 살펴보았다. 말이 심각한 얼굴이지 언제나 그 표정이다. 저놈의 포커페이스. 농담을 해도 먹히지가 않고, 기분 나쁜 소리를 해도 그 표정이 그 표정이다. 이 녀석도 웃을 때가 있을까.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당황해서 얼굴을 붉히기도 할까. 아니,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 그러고 보니 꽤 곱상하게 생긴 얼굴인데. “이거, 범인이 쓴 그 문장 그대로가 맞습니까?” 느닷없는 질문에 경준의 얼굴을 감상 중이던 호는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야. 원본은 감식반에 넘겼고, 그건 그대로 베껴 쓴 거니까.” “이거, 성경이 아닙니다.” “뭐……?” “확실합니다. 성경이 아닙니다.” “그럼 도대체 무,” “이야~ 두 사람 벌써 친해졌네요!” 화들짝 놀란 호가 고개를 들었다. 태윤이 캔커피 두개를 들고 웃으며 서 있었다. “깜짝 놀랬잖아.” “아니 얼굴 맞대고 두 분이 속닥거리는 게, 너무 친해진 거 아니에요?” 태윤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호에게 커피를 건네자 “질투하시는 겁니까?” 경준이 웃으며 물었다. “까분다.” 저보다 상사인 경준의 머리를 마구 흩트리며 태윤은 그에게도 커피를 건넸다. 호는, 후훗, 낮게 웃으며 태윤의 커피를 받아드는 경준을 보며 ‘웃으니 더 훤하구만.’ 하며 캔을 땄다. 그리고 한 모금 마시던 호가 사례 들린 사람마냥 커피를 뱉어냈다. 웃었다. 정경준이! 왜? 무엇 때문에? “괘, 괜찮으세요, 선배?” 태윤이 걱정스런 얼굴로 호의 등을 두드렸다. 이내 예의 살벌한 표정이 되어 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경준에게서 호는 그제서야 ‘무엇’을 정체를 눈치 챌 수 있었다. * 오전에 잠깐 날이 개는가 했더니 점심을 먹고 나자 어김없이 빗방울이 떨어졌다. 언제나 처럼 자잘거리며 나리는 빗줄기. 한 두 번이면 운치 있어 좋으련만 벌써 한달 가까이 내리는 비는 피곤함만 가중시킬 뿐이다. 태윤은 팔을 뻗어 크게 기지개를 켜며 시계를 봤다. 어느덧 열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벌써 자려나 싶어 전화기를 들고 번호를 누르자 신호음이 두 번 떨어지고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받는다. 「여보세요?」 “안 잤어?” 「이제 자야죠. 윽, 깨버렸다. 잠시만~」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혀짧은 소리가 전화기에 대고 소리친다. 「아빠야?」 “그래, 아빠야. 윤정이 왜 아직 안 자고 있어?” 올해 네 살이 되는 딸 윤정이다. 태윤의 윤과 아내 현정의 정을 한 자씩 따서 만든 이름. 얼마 전까지 하루의 절반도 넘는 시간을 잠으로 메우던 아이였는데 언제부턴가 엉금엉금 기기 시작했고, 또 언제부터인가 걸음마를 시작했다. 옹알이를 하는 구나하며 부부가 놀란 얼굴로 박수를 친게 언제더라. 어느덧 딸은 TV에 나오는 가수의 노래를 서투르나마 따라 부르게 되었다. 「아빠 올 때 까지 기다리고 있었어.」 뒤에서 현정의 ‘아빠 내일 온댔잖아. 어서 자~’ 하는 사정조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윤은 갑자기 가슴이 뭉클거렸다. “아빠 내일 갈거야.” 「왜? 야근이야?」 언제 또 야근이란 말을 배웠을까. 기특함에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그래. 야근이야. 그러니까 엄마랑 손 꼭 잡고 자. 내일 놀이방 가야지.” 「사실은, 아까 조금 잤어.」 “그래?” 「응, 꿈에서 아빠가 아슈크림 케잌 사와서, 그거 먹었어.」 “맛있었어?” 「응,응! 엄청 달고 맛있었어!! 텔레비에 나오는 것 보다 더 맛있었어!」 텔레비에 나온 음식의 맛을 니가 어떻게 알아. 태윤은 쿡쿡거리며 고개만 끄덕였다. “아빠가 내일 들어갈 때 아이스크림 케잌 사 갈게.” 「정말?」 네 살배기의 환호에 태윤은 가슴이 즈끈거렸다. 경찰이란 직업을 가진 남자가 으레 그렇듯, 그도 집에 귀가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만약 내근직을 택했더라면 평범한 아버지, 남편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주말이면 공원에도 가고, 딸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동경하던 선배를 따라 강력계를 선택한 것이 어언 4년. 동시에, 결혼을 한 지도 벌써 4년째다. 현정은 참 속이 깊고 다정한 여자였다. 누구네처럼 얼른 직종을 바꾸라는 닦달도 없이 ‘다른 생각 말고 몸이나 잘 챙겨요’ 같은, 사소하지만 힘이 되는 응원을 해 주는 참으로 좋은 아내였다. 그런 가족들을 위해 뭘 해 주었더라. 딸이 커 가는 과정을 지켜 볼 새도 없이 일주일 두세 번 집에 들러 갈아입을 옷만 들고 나갔다. “정말이야. 내일 사갈게.” 「그럼 아빠! 토끼모양으로 사와!」 “토끼?” 「응! 강아지 말고 토끼! 토끼 귀가 제일 맛있었어. 그러니까 꼭 토끼로 사다줘, 알았지?」 “그래, 알았어. 꼭 토끼로 사 갈게.” 「응응! 아빠 꼭 사와! 내일은 집에 꼭 와야 해? 나, 아빠 올 때 까지 안 잘거야.」 “알았어.” 몇 번이나 다짐을 받아내는 어린 마음. 그리고, 「응? 아! 아빠~ 사랑해요~ 힘내세요~」 데구르르 굴러가는 목소리에 태윤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찔끔거렸다. 수화기 뒤에선 현정이 ‘잘했어. 아유, 우리 딸 착하기도 하지.’ 하며 뿌듯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아내에게도 문단속 잘 하고 잘 자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자 순식간에 고요한 침묵이 엄습한다. 하지만 공허해 할 틈도 없다. 힘내라는 딸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태윤은 ‘아자!’ 하며 크게 기합을 넣었다. 자세를 바로하고, 책상 위의 서류들을 훑기 시작했다. 죽은 네 명의 자세한 신상과 탐문수색으로 거두어들인 주변의 목소리를 한데 모은 잡다한 서류들이 놓여있었다. “힘내자!” 태윤은 가장 위에 놓인 종이 한 장을 집어 들며 스스로에게 외쳤다. * “보세요. 여긴 분명히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네가 네 언니의 길을 그대로 따라갔으니, 나는, 네 언니가 마신 잔을 네 손에 넘겨주겠다.’ 종이에 적힌 글귀와는 조금 틀리지요?” 그 말 그대로였다. 종이에는 ‘너는 내 눈앞에서 네 언니의 모습을 닮아 갔다. 네 언니가 마신 잔을 네 손에도 들려주리라’ 라고 몇 가지 조사와 명사가 달리 적혀져있었다. “그 성경책 좀.” “아, 여기.” 들고 있던 성경책을 건네주자 이번에도 경준은 같은 페이지를 펼쳤다. “여기도 보세요. 이건 지금 이 성경이랑도 조금 다르지요. 여긴 ‘네가 네 형의 길로 행하였은즉 내가 그의 잔을 네 손에 주리라.’ 라고 적혀 있잖아요.” “…… 왜 다른 거지?” 호가 아연한 얼굴로 물었다. “다른 책이니까요.” “뭐?” “정확히는 ‘번역이 다른’ 책 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렸죠? 공동번역 성서는 천주교 신자들이 쓰고, 기독교 신자들은 개역 한글판이나 표준 새 번역을 쓴다구요.” “아, 응.” “제가 선배님께 드린 성경이 개역 한글판입니다. 그리고 이 성경은 표준 새 번역이구요. 그리고 이 종이에 적힌 구절은 분명…….” “공동번역?” 호의 물음에 경준이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범인은…….” “네, 범인은 ‘성경’을 베낀 게 아닙니다. 공동번역 ‘성서’를 보고 구절을 베낀 겁니다.” 과연 그렇군,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경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종이는 피해자의 입 속에 들어있었다고 했었죠.” “응.” “범인은 혹시… 일부러 성경에 종이를 꽂지 않은 게 아니라… 꽂을 수 없었던 게 아닐까요?” “무슨 소리지?” “지금까지 해 온 대로라면, 녀석은 에스겔의 첫 페이지에 23:31 이라는 숫자가 적힌 종이를 꽂아뒀어야 했습니다. 그렇지요? “그래.” “그런데 녀석은 ‘어떤 이유’로 그 페이지를 찾을 수 없었던 거죠.” “어떤 이유?” “네. 그리고 에스겔의 첫 페이지를 찾을 수 없었던 녀석에게 그 숫자는 별 의미가 없었죠. 아니, 녀석에겐 의미가 있다고 해도 그 종이를 받아 든 우리가 이게 어느 편의 이야기인지 찾을 수 없다면 그건 말 그대로 무용지물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그래서 녀석은 아예 그 구절을 통째로 쓴 거죠.” “그리고 그 종이를 접어서 입 안에다?” “네.” “그럼 녀석이 에스겔의 첫 페이지를 찾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 어떤 이유는 도대체 무슨 이유지?” “녀석이 찾은 건 에스겔이 아닙니다.” “그럼?” “에제키엘입니다.” “에제키엘?” “천주교의 성서에는 에스겔이 에제키엘로 번역되어있습니다.” “…….” “녀석은 천주교입니다.” 시끄러운 벨 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경준과의 대화를 더듬으며 범인의 실마리를 쫓던 호는 느닷없이 들려온 벨소리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핸드폰을 찾았다. “여보세요.” 「한 선배?」 “누구냐. 태윤이냐…… 지금 몇시냐.” 「열두시가 넘었습니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시계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냐.” 「선배, 지금 당장 와 주십시오.」 “뭐?” 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청으로 와 주십시오. 급합니다. 지금 빨리요.」 호는 바닥에 떨어진 잠바를 주워 팔을 꿰며 대답했다. “알았어. 지금 가지.” 「다들 불렀습니다. 지금 빨리 와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태윤은 전화를 끊었다. 다들? 다들 누굴 불렀다는 거지? 사소한 의문은 넘기고 호는 현관으로 내달렸다. 열두시가 넘은 시각이었지만 몇 개의 창은 불을 밝히고 있었다. 택시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호는 달리기 시작했다. 탁탁탁. 발소리가 빈 계단과 복도에 울리고 호는 알 수 없는 불안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무실 입구에 다다랐을 때, 이미 심장은 터질 듯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한 형사…….” “한…….” 끔찍한 얼굴로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들을 헤치고 호는 앞으로 나아갔다. “어이, 김 경장. 기다려, 자면 안돼.” “한 형사가 왔습니다!” “한 형사가 왔다네!! 기다려! 자지마!” “태윤……?” 호의 목소리에 태윤이 눈을 깜박이며 대답했다. 이미 피투성이로, 동료 형사의 품에 안긴 채로. “…….” “하, 한 선배…….” 헐떡거리며 태윤이 입술을 움직였다. 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입 다물어.” “한…….” “입 다물어! 말 하지 마!!” 와락 달려들어 껴안았다. 자신의 뺨과, 손, 옷에도 흥건한 피가 묻어났지만 호는 개의치 않았다. “말 하지 마…… 병신새끼….” 태윤이 가쁜 숨을 쉴 때 마다 찢어진 목 사이로 꿀럭거리며 피가 흘러나왔다. “하, 한…….” “닥쳐! 입 다물어!!” “버, 범인은…….” “됐다니까!!!!” 호는 태윤의 벌어진 목의 상처를 감싼 채 소리 질렀다.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런 호를 보며, 어쩐 일인지 태윤은 웃었다. “웃지마, 병신아!” 버럭 소리를 지르는데 목구멍에서부터 오열이 터져 나왔다. 태윤이 새파란 손가락을 움직여, 좀 더 자신에게 다가오길 원하고 있었다. “범…인은…….” 그리고 호의, 피에, 눈물에 젖은 얼굴을 바라보는 태윤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흘렀다. “버, 범인은…….” “됐어! 그런건 나중에 말해!!!” 태윤은 끅끅 숨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마치 나중은 없다는 듯. 그리고 다시 입을 열자, 이번에야말로 검은 피가 꿀럭이며 입 안에서 터져나왔다. “입 다물라고 했지!!!” 태윤은 한참동안 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흐, 흑! 흐흑! 흐흐흑!” “울지 마! 왜 울어 이 새끼야!! 울지 마!” “유, 윤정이…흑! 케, 케잌…! 케잌! 흐윽!” “울지 마! 케잌이고 뭐고 사다주면 되잖아! 왜 울어, 이 병신아!!!” “미안, 하다고…….” “…….” “아빠가, 미안… 하다고…….” “…….” “정, 말… 미… 안…… .” 그 말을 끝으로 태윤은 눈을 감았다. 눈꼬리에선 아직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호는 말없이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는 태윤의 주검을 껴안았다.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 금세라도 일어나 귓가에 “한 선배!”하고 큰 소리로 외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태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일어나라고 몇번을 불러도, 대답소리도 하지 않는다. 귓가에는 아직도 그 목소리가 생생한데. 「 그야, 처음에는 한 선배 따라 온 강력과지만… 지금은 아니라구요. 만약 한 선배가 다른 곳으로 가셔도 전 여기 있을 겁니다. 이 일이 좋…… 엑?? 진짜요? 정말 입니까? …… 뭐예요… 놀리지 말아요. 아, 정말…….」 「 일주일만인데 불쑥 컸어요. 벌써 엄마라는 말까지 해요. 아빠보다 엄마 먼저 익혔다고 마누라는 좋아 죽더라구요. 」 「 선배는 제 영웅입니다. 」 「 한 선배…… 범인은……. 」 「 미안… 하다고……. 」 「 한 선배……. 」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가슴이 아파서, 숨을 쉴 수가 없다. 호는 언제까지고 그렇게 앉아있었다. 죽은 태윤을 끌어안고서. 찾고자 하는 물건은 마루에 떨어져 있었다. 허리를 굽히며 그 물건을 줍는 내 귓가에 찌부러지는 듯 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목소리 같기도, 짐승의 울음 같기도 한 묘한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한 걸음, 한 걸음 …… 천천히 다가오던 소리가 어느 순간 멈추었다. 소리가 멈춘 안쪽에는 그가 있었다. 이미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여섯 번째 남자 주님, 나를 건져 주십시오. 주님, 빨리 나를 도와주십시오. [시편 40:12] 「 죽일…은 아니었…… 지만… 려서…… 수 없이…킥! 키히!! 벌써 잡히면 안…지… 아직 한 … 가… 더 남았…… 찢은 종이는 …에 있어… 잘 찾아 봐…… 키키! 」 * “뭐 이상한 거 있어?” 호의 물음에 경준은 즉답했다. “있습니다.” “뭐?” “한 장이 뜯겨져 나가있어요.” 피에 절은 성경을 내려놓으며 경준에게 어디? 라고 묻자 ‘여기요’ 하며 에스겔의 가운데를 펼쳤다. “에스겔 23장.” “그건…….” “오홀리바와 오홀라. 윤상재의 입에서 나온 종이에 적혀있던 구절이죠.” “그리고 네가 읽어보라며 표시를 해 둔 페이지였고.” 경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읽어보셨습니까? 하고 묻는다. “읽었어.” “그럼 제가 꽂아 두 메모지는 버리셨나요?” “아니. 처음 페이지에 그대로 꽂아두었지.” 그렇게 말하며 호는 손바닥으로 눈을 덮었다. 태윤이 당한 현장은 말 그대로 피바다였다. 책상위고 바닥이고 온통 피 투성이었고 그 위의 서류들도 태반이 피에 얼룩져있었다. 동료의 죽음에 분개한 팀원들은 이를 악물며 수색을 시작했고 몇 시간에 걸쳐 알아낸 사실은 단 한 가지였다. '없어진 건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김경장은 왜 죽은 겁니까!!!” 태윤과 직위가 같은 이기형 경장이 터져 나오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 “뭐 하나 중요한 단서를 찾아 낸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죽은거냐구요!!” 침통한 분위기속에서 불쑥 누군가가 말했다. “우리 눈에 안 보이는 건지도 모르죠.” “…….” 뚜벅거리며 다가온 경준이 피로 얼룩진 책상이의 서류들을 살피며 말했다. “여러 가지를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첫째, 김 경장이 찾아 낸 건 확연하게 눈에 드러나는 서류 따위가 아니다. 둘째, 설령 서류라고 하더라도 그 내용이 미진하여 여러 가지를 연계시켜 생각하지 않는 이상은 찾기가 힘들다. 셋째, 김 경장이 찾아낸 건 서류 따위의 정형된 증거가 아니다. 넷째, 증거 따윈 없었다. 그가 알아낸 건 오로지 ‘범인’의 정체다.” 막힘없이 술술 말하는 경준을 보며 기형이 입을 열었다. “정 경위가 왜 여기…….” “제가 불렀습니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사람들이 벌떡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운은 고개를 까닥여 인사를 하고 말을 이었다. “이번 일과 같은 사건은 강력계의 틀에 박힌 조사로는 범인을 잡을 방법이 요원합니다. 이렇다 할 증거와 증인이 없을 경우에는 눈앞에 놓인 상황과 정황으로 하나부터 차근히 추리를 해 나가는 방법이 더 효과적인 법이죠. 정 경위는 그 방면에서 이미 정평이 난 인재입니다. 거기다 정 경위는 여러분이 골치를 썩히고 있는 성경에도 일가견이 있구요. 당분간 김태윤 경장의 책상에서 사건을 조사 할 테니, 쓸데없이 범정과 사무실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없도록 합시다.” 지운의 말에 사람들은 힐끔거리며 호를 바라보았다. 호는 복잡한 얼굴로 자신의 책상을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혀를 찼다. “그럼, 계속 수고들 하십시오.” 사람들의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지운은 사무실을 떠났다.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인사를 하며 경준이 호의 옆, 태윤의 책상 앞에 섰다. 그리고 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태윤의 의자에 앉는 경준에게 호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앉지 마!” 그 큰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쯧, 하고 혀를 차는 호의 귀에 경준의 목소리가 닿았다. “도와주십시오.” “뭘 도와? 니가 우릴 돕는다는 명목으로 온 거 아니야? 젠장.” “도와주십시오…….” 끝이 떨리는 목소리에 그제야 호는 아차하며 경준을 바라보았다. 경준은 태윤의 책상을 노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태윤 선배 죽인 녀석… 꼭 잡게 도와주십시오…….” “…….”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 성경책은 어디에 있었던 거죠?” 냉정한 경준의 얼굴을 보며 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저기.” 호는 고개짓으로 강력과 입구 근처의 바닥의 가리켰다. “태윤 선배가 쓰러진 곳은 바로 여기였으니까…… 이 성경을 입구 근처에 팽개쳐 놓은 건 범인의 짓이겠군요.” “그렇겠지.” “구태여 입구에다 던져 놓았다는 얘기는, 여차하면 그대로 들고 갈 수도 있었다는 얘기겠지요?” “그렇지.” 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범인은 성경을 들고 갈 생각을 했었다는 말인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성경을 들고 가려고 했던 걸까요?” “성경에서 자신을 알리는 중요한 단서를 찾았다는 소리인가.” 경준은 글쎄요?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거라면 구태여 에스겔 23장을 뜯어갈 필요가 있었을까요? 녀석이 윤상재의 입속에 에스겔 23장 32절의 글귀를 집어넣음으로써 우리는 이미 오홀리바와 오홀라의 이야기를 알았습니다. 녀석은 단 한 구절을 적었지만 아무래도 그 의미를 파악하려면 우리는 23장 전체를 읽어야합니다. 녀석이 의도한 것도 바로 그거구요. 그런데 이미 우리 모두가 읽어서 알아버린 23장을 뜯어간 이유가 뭘까요. 그렇게 하자면 전국의 성경에는 에스겔 23장이 뜯겨져 나가야 합니다. 중요한건 이 성경책이, 바로 제가 한 선배님께 드린 그 성경이라는 겁니다.” “…….” “그리고 이 성경에는 제가 드린 메모지가 꽂혀 있었구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거야?” 호가 답답하다는 얼굴로 채근하자 경준은 이런 이야기 일수록 더 차분히 말해야 한다는 듯 침착한 말투로 물었다. “만약 선배님께서 뭔가를 급하게 메모를 해야 하는데 종이가 없습니다. 다급한 마음에 옆에 있는 책을 집어 들고 펼쳤습니다. 그럼 과연 몇 페이지가 펼쳐질까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호가 어이없다는 말투로 대꾸하자 그렇다면, 하고 경준이 말을 이었다. “그 책의 203 페이지에는 책갈피가 하나 꽂혀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심코 펼쳐든 페이지는 과연 페이지일까요? 물론, 여기에 한 선배의 의지는 작용하지 않습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203페이지가 펼쳐지겠지.” “그럼 태윤 선배가 급한 마음에 이 성경을 펼쳐들고 메모를 남겼다면, 그 메시지가 남겨진 페이지는 어디일까요?” “네 메모지가 꽂힌 곳…….” “네, 에스겔 23장입니다.” “그럼…?” 눈을 크게 뜨는 호에게 경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추리입니다. 사실이 아니에요. 그저, 단지 추리일 뿐입니다.” “아, 그래. 그렇지.” “그럼 계속 해 볼까요. 어쨌거나 태윤 선배는 급하게 이 성경을 펼쳐들고 메모를 남겼습니다. 중요한 건 ‘급하게’ 라는 부분입니다. 만약 시간이 느긋하거나 여유로운 상황이었다면 이 수많은 종이를 두고 하필이면 성경에다 메모를 했을 리가 없어요. 거기다 이 피.” 경준은 피에 푹 절이다시피 한 성경을 집어 들며 말했다. “태윤 선배가 성경에 메모를 한 건, 아마도 범인에게 습격을 당한 후의 일일 거예요.” “…….” “범인에게 목과 등을 찔린 상태에서 한 번 쓰러진 태윤 선배를 두고, 범인은 달아났을 겁니다. 일체의 서류나 물건이 분실되지 않았다는 건, 애초에 여기 있는 이 서류들에는 범인의 정체를 알릴만한 결정적인 단서가 없었다는 얘기도 됩니다. 그렇다는 건 즉, 태윤선배는 이 서류들로 인해 범인의 정체를 눈치 챈 것이 아니라는거죠. 물론, 이 서류에 근거한 또 다른 증거를 얻었을지는 몰라두요. 아무튼 범인은 태윤 선배가 자신의 정체를 알았다는 걸 알고 선배를 찌른 것입니다. 그리고 놈은 도망을 갔다가 어떤 이유로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고, 거기서 태윤 선배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과, 필사의 힘으로 성경에 메모를 남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죠. 그리고 다시 선배를 찌른 후, 선배의 메시지가 남겨진 성경책을 들고, 현장을 빠져나가려다 이 성경을 들고 도망가는 게 무리라는 사실을 깨달은 거죠.” “어째서?” 잠깐 생각하는 얼굴을 하던 경준이 그럼, 하고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그냥 간단한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 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생각 해 봅시다. 녀석은 태윤 선배가 한 형사님과 팀 동료들에게 전화 하는 걸 듣고 있다가, 통화가 끝나자마자 선배를 해쳤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도망쳤다가, 어떤 이유, 에 의해 현장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다 태윤 선배가 제 성경책에 뭔가를 적어 둔 걸 발견하고 성경을 없애야겠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하지만 녀석은 그럴 수가 없었어요. 먼저 온통 피에 젖은 이 성경을 들고 다닌다면 아무리 주의해도 옷을 버리게 됩니다. 그렇다고 이 근처 쓰레기통이나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버리자니 곧바로 관계자에 의해 발견되어 우리 손에 들어 올 테고 말이죠.” “멀리 가져가서 버리면 되지.” “시간이 없었겠죠.” “…….” “알겠습니까. 놈에게는… 멀리 가지 못할 만한 '사정' 이 있었습니다.” “… 그리고 옷을 갈아입지 못할 사정도?” “그렇죠.” “…….” “그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태윤 선배의 손에서 빼앗은 성서를 버리러 나갈 만큼의 여유도, 피에 젖은 옷을 갈아입을 여유도. 어째서요? 왜 범인은 그렇게 시간이 부족했을까요?” 호가 애매하다는 표정을 하자, 경준은 그렇다면, 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게 범인이 현장과 바깥을 왔다 갔다 하는 동안, 청안의 사람은, 그러니까 경비나 직원들은 아무도 그를 붙잡지 않았습니다. 분명 어젯밤 태윤 선배가 살해당하던 시각에 청안에 남아있던 사람은 아무도 수상한 낯선 사람은 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청안의 사람들에게 범인은 ‘수상한 낯선’ 인물이 아니었던거죠.” “…….” “이곳 서울 지검청 사람들에게 전혀 낯선 인물이 아닌 범인은, 어째서 그렇게나 시간이 촉박했을까요? 이곳 사람들에게 익숙한 그는, 누구에게 들킨다고 해서 쫓겨날 입장도 아니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급했던겁니다. 멀리 성경을 버리러 도망을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 피에 젖은 두꺼운 걸 품안에 품고 있을 수도 없었죠. 그래서 급한 대로, 태윤 선배의 메모가 적힌 23장만을 뜯고 책은 입구에 버려둔 겁니다. 도대체 녀석은 뭐가 그렇게 급했던 걸까요?” “…어서 지검청으로 돌아와야 했으니까?” 설마하는 호의 눈빛은 이미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청으로, 이 사무실로 돌아와, 동료들과 함께 태윤의 시체를 보고 경악을 해야 했으니까?” 그렇습니다, 하고 경준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범인은 내부의 인물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태윤 선배가 범인의 정체를 알아 차렸다는 것도 이야기가 쉬워집니다. 태윤 선배는 그 날 야근을 하기 전 까지는 전혀 그런 내색이 없었어요. 알고도 말 하지 않았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구요. 아마 선배는 야근을 하면서, 범인의 정체를 눈치 챘을 겁니다. 어쩌면 범인과 대화를 나누던 도중에 그 사실을 알았을 지도요. 그리고 범인이 자리를 뜬 사이에 한 선배님과 팀 동료들에게 전화를 했던 겁니다. 그리고 숨어서 그 통화를 듣고 있던 녀석은 선배가 통화를 끝내자마자…….’ ‘그렇다면 동료들 중에 태윤의 전화를 못 받은 녀석을 찾는 건…….’ ‘나는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면 끝이잖습니까. 그리고 태윤 선배도 모든 팀원들에게 전화를 한 건 아닙니다. 통화기록에 따르면 태윤 선배는 한 선배를 포함한 네 명의 동료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은 그들에게 전화를 듣고 달려 온 사람일 겁니다. 태윤 선배의 사고 소식을 듣고 왔을 수도 있구요. 그리고 나는 일이 있어서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소란스러워서 와 봤더니 사건이 터졌더라고 하면 누가 거짓말인지 안답니까.’ 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엉망진창이다. 물론 경준은 몇 번이나 ‘이건 어디까지나 추리입니다.’ 라고 못을 박았지만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자 아무도 믿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태윤의 죽음에 슬퍼 할 겨를도 없이 눈을 번득이며 동료들을 견제해야 하는 입장에 처했다.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이젠 아무래도 좋다, 범인 따위 저 좋을 대로 내버려 두자는 생각까지 들었다. 퇴근시간은 이미 한참이나 지났지만 책상에서 일어나기도 싫었다. 내일은 경준이 만나봐야 할 사람이 있다며 함께 가자고 했지만 그것도 귀찮았다. 그냥 이대로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책상위에 이마를 대자, “여기서 뭐 하십니까…….” 지운이 짐짓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입구에 서 있었다. “…아직 퇴근 안 하셨습니까?” “철야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가까이 다가오는 지운의 얼굴은 눈에 띄게 수척했다. “그러는 한 형사님이야 말로 이 시간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움직이기가 귀찮아서 말입니다…….” 호의 말에 지운이 피식 웃으며 책상에 허리를 기댄다. “내일은 류병우의 형을 찾아 가신다구요?” 호가 고소(苦笑)했다. “충직한 개로군.” “정 경위는 제 재량으로 투입된 사람입니다. 보고를 듣는 건 당연하지요.” “아하, 그렇습니까.” “어쨌거나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호는 울컥 욕지기가 치솟았다. 그 대단한 능력 때문에 자신은 지금 전의를 상실했다. 아무리 추측이라도 그렇지 동료 중에 범인이 있다라니. 그 따위 추리는 안하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을 하며 가슴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하지만 한 대를 꺼내 입에 무는 순간, ‘선배, 금연하신다더니’ 하는 태윤의 목소리가 떠올라 그만 온 몸에 힘이 빠지고 말았다. 입 안이 써 물고 있던 담배를 도로 집어넣고 한숨을 내뱉었다. 그런 호를 보며 지운은 잠깐 힘없는 얼굴을 하더니 책상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풀 죽어 있는 모습, 안 어울립니다.” “안 어울려도 나야.” “김 경장이 보면 퍽이나 좋아하겠군요.” 그리고 그대로 걸어 나가는 뒷모습에 호는 울컥 화가 치솟았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지운은 아랑곳 않고 앞을 향해 걸어갔다. 그 태연한 모습에 더욱 화가 나 의자를 박차고 따라갔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어깨를 붙잡아 돌리며 외쳤다. “태윤이는!!” “김태윤은!!!”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소리로 지운이 외쳤다. “도대체 뭡니까! 김태윤은 뭐냐구요! 당신 상사입니다! 그리고 후배예요. 단지 그 뿐입니다. 함께 사건을 처리하던 파트너 형사였고, 어제 죽은 옛 동료입니다. 그런데 왜요! 도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왜 이렇게 한심한 꼴로 앉아있는 겁니까!! 슬퍼할 시간이 있으면 그를 죽인 범인에 대해 조사하십시오. 당신의 역할은 녀석의 손에 수갑을 채우는 것이지, 죽은 김 경장 시체를 끌어안고 통곡하는 게 아닙니다! 알겠습니까!” 자신의 어깨를 짚은 호의 손을 차갑게 쳐 낸 지운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범정과도 지금 바쁩니다. 정 경위… 어렵게 데리고 온 사람입니다. 물론 그가 자진한 것도 있지만…… 하아.” 지운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뭔가 하려던 말을 삼키고 입술을 깨물더니 ‘수고하십시오.’ 한 마디를 내뱉고 등을 돌려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이윽고 발소리가 멀어지고, 호는 무너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자신의 입장에만 급급한 나머지 주위의, 특히 지운의 심정을 살피지 못했다. 무리해서 정경준을 투입시킨 것도, 어쩌면 힘없이 늘어져 있는 자신이 안타까운 이유에서 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네가 뭘 아냐고 소리친 게 후회되기 시작했다. 자신의 한심함에 치가 떨리고 마지막으로 본 입술을 깨물던 얼굴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 젠장!” 결국 호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성큼 거리는 걸음으로 부장검사실을 찾았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열자, 책상에 앉아있던 지운이 놀란 눈으로 벌떡 일어섰다. “무슨…” “혹시… 우는가 해서…….” 호의 대답에 지운은 쓰게 웃었다. “그렇게 어린애로 보입니까.” “눈이 젖었는데.” “아, 요즘 눈이 좀 피곤해서….” “거짓말이야.” “…….”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됐다. 안 울면 됐어.” 사실은 껴안고 미안하다고 말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이 어디인가를 깨닫는 순간,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애초에 직장에선 사적인 이야기도 금하기로 했다. 그런데 하물며 지금 당장 껴안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니. 갈수록 가관인 자신에게 한숨을 쉬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검사실을 나왔다. 힘없이 사무실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에, 철컥- 하고 검사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호의 입술에 따뜻한, 젖은 감촉이 부딪혀 왔다. “자, 잠시만, 여긴…….” 아무리 늦은 시각이고 사람이 없다고 해도 이렇게 복도에서 대담한 키스를 해 올 줄은 몰랐다. 당황한 호가 떼어내려 했지만 지운은 더욱 강한 힘으로 자신에게 매달렸다. “잠시만, 누가 보면,” “상관없어요.” 그렇게 말하며 가랑이 사이로 뻗어오는 손길에, 호의 이성도 단숨에 날아갔다. - 쾅!! 큰 소리를 내며 검사실의 문이 닫혔다. 무서운 기세로 옷을 벗으며 책상까지 걸어가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입술을 떼지 않았다. 언제나 난관은 지운의 셔츠 단추다. 서두를수록 미끄러지는 손가락에 호가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대로 잡아 벌리려는 걸 지운이 급한 목소리로 저지했다. “내일도 입어야 해요. 제발 참아요.” 그리고 하나, 하나 단추를 풀어 내리는 동안 호는 자신의 옷은 물론 지운의 바지와 속옷도 모두 벗겼다. 순식간에 알몸이 된 지운이 책상위의 자신의 명패를 발로 차서 떨어뜨린 걸 신호로, 둘은 짐승처럼 엉키기 시작했다. 온갖 난잡한 자세가 이어지고, 끈적한 숨소리와 높은 신음에 부장검사님의 성역(聖域)은 단숨에 러브호텔보다 더 음란한 무드에 물들었다. 물론 호텔의 몇 배는 환하게 밝은 조명아래에 지운은 남김없이 자신의 온 몸을 드러냈고, 단숨에 러브호텔의 침대로 전락한, 서류와 책으로 무장된 책상 위에서, 책상의 주인을 마음껏 농락하며 호는 상상이상의 쾌감을 느꼈다. “아…아, 아! 거, 거기…!” “여기?” “으, 응…… 좋아… 흐읏! 아아…더 세게… 응… 주, 죽을 것 같아…….” 지운도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이런 저런 주문을 해 대며 자지러지듯 허리를 비틀었다. 그러다 호가 사정을 위해 빼내려 하자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그냥, 안에다가….’ 하며 말하는데, 하마터면, 정말 그대로 쌀 뻔 했다. 거의 이성을 잃은 지운의 앞에서 그나마 간신히 제정신을 찾은 호가 ‘이곳에선 샤워도 못한다’ 고 하자 그제야 지운은 아쉬운 얼굴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욱 기가 막힌 일은 다음이었다. 자신의 손에 정액을 받아낸 호가 ‘티슈는?’ 하고 묻자 지운이 자신의 머리가 깔고 누운 서류 한 장을 빼더니 ‘이걸로 닦아요.’ 하며 내미는 게 아닌가. 멍한 표정으로 서류를 받아들고 봤더니, 내일까지 결제해야 할 보고서들이었다. 화들짝 놀란 호가 서류를 바닥에 내려놓고 지운이 발로 차 떨어진 명패로 고정시켰다. 그리고 손에 묻은 정액은 결국 다시, 진입을 위한 윤활제로 쓰였는데 삽입 되는 순간 훅, 하고 숨을 내뱉은 지운이 호의 땀에 젖은 등을 껴안은 채 웃었다. “왜 웃어?” “결국 안으로 들어왔잖아요. 차라리 안에다 하지 그랬어.” 대담한 소리에 기 막혀 하면서도 그 천진한 얼굴에 넋을 잃고 호는 다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사실 쇼파에 누워 잠을 자던 호는 부스럭거리는 기척에 눈을 떴다. 어렴풋이 보이는 창 밖은 온통 새까맸다. “깼어요?” 어둠 속에서 조금 허스키한 목소리가 묻는다. “몇 시지…?” “네 시…… 조금 넘었군요.” “안 잤어?” “방금 깼어요.” 싸늘한 침묵에 어둠이 겹쳐 한층 더 괴괴한 분위기다. 지겹도록 내리던 비도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는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안 추워요?” “참을 만 해.” “이거, 덮으세요.” 지운은 자신이 덮고 있던 호의 잠바를 돌려주었다. “됐어. 니가 덮어.” “전 괜찮습니다. 제가 덮고 있던 거라 아마 따뜻할 거예요.” “됐다니까…….” “더 주무세요. 깨워 드릴테니.” “너는…?” “…….” 지운의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호는 다시 깊은 수면 속으로 빠져들었다. * “임수호, 류병우, 도준호, 윤상재. 네 사람이 모두 우이동 교회에 함께 다녔던 건 겨우 일년입니다. 그건 아시죠?” 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정확히 16년 전이죠. 당시 임수호 열여덟, 류병우 열여섯, 도준호 열일곱, 윤상재 열 아홉.” “다 안다니까.” “그럼 16년 전에 우이동에서 초등학생 하나가 유괴된 사건은 알고 계세요?” “뭐?” 시트에 널부러져 있던 호가 번쩍 몸을 일으켰다. “서류에는…!” “서류에는 당연히 없죠. 혐의사실도 없는데 조사 기록이 있을 리가.” 경준은 솜씨 좋게 운전대를 돌리며 말했다. “우이동 주민들 상대로 한 탐문조사서에 짧게 언급되어 있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기가 막히게도 그 사건 발생 시점이 죽은 네명이 함께 교회를 다녔던 그 일년과 겹친 거죠. 해서 조사를 해 봤더니,” 급커브가 나오자 경준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끼이이익- 바퀴가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굴렀고 호는 안전벨트를 찾았다. 그런 호를 바라보며 경준은 무표정하게 ‘생명벨트 매십시오.’ 하고 말했다. “조사 해 봤더니 이런 기사가 나오더군요.” 경준이 운전석과 문 사이에 끼인 종이 한 다발을 꺼내 호에게 건넸다. “16년 전 그 사건을 다룬 신문을 죄다 복사했습니다. 거기 사…,” 끼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이번에야말로 바퀴가 찢어진 듯 했다. 미처 벨트를 매지 못한 호가 벌렁거리는 가슴으로 소리치려는 찰나, “…!!” 호의 입을 오른손으로 막은 경준이 왼손 검지를 세워 자신의 입술에 갖다댔다. 쉿. -경준의 입술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류병열은 참담한 얼굴로 커피잔을 쥐었다. 그는 자신의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음을 알았지만 그걸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뭘 숨기겠습니까. 모두 사실대로 말하겠습니다.’ 하고 약속을 한지 어느덧 이십 분. 이미 끔찍한 과오의 절반은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물론 그가 그런 약속을 하기까지는 ‘모두 다 알고 왔습니다. 숨기셔도 소용없어요.’ 라는 젊은 형사의 협박과 ‘이미 한참 전에 시효가 지난 일입니다. 협조해 주십시오.’ 중년 형사 사이의 적절한 강도의 밀고 당김이 있었다. 결국 류병열은 모두 사실대로 고하겠노라고 약속을 했고, “유괴, 납치는 시효가 지났습니다만, 만약 오늘 선생께서 사실을 속이신다면 위증죄가 성립됩니다. 그건 아시죠?” 젊은 형사는 끝까지 협박을 아끼지 않았다.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류병열은 “그 아이는…….” 하고 입을 열었다. 아이는 교회의 권사의 아들이었다. 부모의 크리스마스 준비 작업에 따라온 아이는 초등학교 6학년 치고는 조금 체구가 작은 편이었다. 권사 부부가 일을 하는 동안 아이는 혼자 예배당의 뒷줄에 앉아있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아이였기 때문에 함께 놀 친구도 없이 낯선 곳에서 말없이 책을 읽고 있었다. 처음 아이를 발견 한 건 상재였다. 혼자 있는 아이가 애처로워 상재는 몇 번이고 말을 걸었지만 그런 상재의 노력을 녀석은 들은 체 만 체 무시했다고 했다. 그 때 상재와 아이를 발견한 자신이 다가갔고, 귀엽다는 마음에 상대해 주려던 자신과 상재에게 아이는 귀찮다는 얼굴로 ‘꺼져! 멍청이들!’ 하고 소리쳤다. 기껏 어린아이의 의미 없는 욕설이었다. 무시하자면 충분히 무시 할 수 있는 욕설이었지만 자신들은 화가 치밀었다. 자신들의 선의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도무지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때 그들에게 교회 후배 하나가 인사를 하며 다가왔고, 그게 임수호였다. 그리고 하나, 둘 패가 늘어남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자신감과 잔인한 정복욕이 함께 들끓었다. 그들은 먼저 일을 저지를 장소를 물색했다. 마침 아버지는 회사에, 어머니는 역시 교회에 일을 도우러 갔기 때문에 우리집이 비어있다고 자신이 말했다. 우리 집에서 어른들이 점심 식사를 하고 계신다. 너희 부모님이 거기서 널 기다리고 계신다는 말에 아이는 쭈뼛거리며 자신들을 따라갔다. 그리고 당시에, 자신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직 어린 피부는 같은 사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고왔으며 살려달라는 가느다란 울음은 사내들 안의 짐승 같은 본능을 일깨울 뿐이었다. 수호가 옷을 벗겼다. 당시 중학생이던 자신의 동생 병우가 ‘피부 엄청 곱다’ 며 감탄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내년이면 고등부 회장이 되기로 내정된 준호에게 ‘첫 맛’을 볼 영광을 주겠다고 했다. 망설이던 준호는 슬금거리며 그 아이의 입술과 목덜미에 혀를 가져갔고, 답답하다며 준호를 물러서게 한 상재가 본격적으로 아이를 ‘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의 가느다란 발목을 붙잡고 크게 벌린 후 무자비하게 허리를 밀어 넣은 게 바로 자신이었다. 이윽고 정신이 들었을 때는 피투성이가 된 아이는 이미 의식을 잃은 뒤였다. “살려 보내면… 우리 얼굴을 아니까 잡힐 거라고…….” “그래서, 죽였습니까?” 류병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베개로 얼굴을 덮은 뒤 한참을 누르고 있었다. 의외로 숨통은 쉽게 끊어졌다. 처음부터 ‘사람’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일까. 무섭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식어가는 시체를 깨끗이 목욕시키고 처음 입고 있던 옷을 다시 입힌 뒤, 상재의 자전거 뒤에 태웠다. 떨어지지 않도록 허리를 끈으로 단단히 묶고, 아이의 두꺼운 코트를 그 위에 덮었다. 마침 겨울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상재는 힘차게 자전거의 페달을 밟았다. 시체는 일주일 만에 야산에서 발견되었다. 신문과 뉴스에서는 가지각색의 말로 떠들어댔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들을 의심하지 않았다. 당시 그들은 나무랄 데 없는 모범생이었고 착실한 교회학생들이었다. 죽은 아이의 부모조차 착실한 학생들이라며 자신들을 칭찬했었다. 모든 사건이 그렇듯, 일주일도 되지 않아 언론은 잠잠해졌다. 자신들의 교회에서는 그 사건이 적어도 한달은 넘게 화제로 떠올랐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죽은 권사의 아들은 성당에 다닌다고 했다. 이왕이면 교회에 나와 주길 바랐던 부모가 크리스마스 행사준비를 핑계 삼아 교회로 데리고 온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날, 그들의 아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런데 죽은 아이의 장례 예배에서, 그들은 똑같은 얼굴을 만났다. 죽은 아이의 쌍둥이 동생이었다. 그 얼굴을 확인 하는 순간 그들의 머릿속에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흥분과 쾌감, 그리고 짜릿함.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번째 범죄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주에 있을 기도회에 권사 부부가 참가를 신청했음을 확인하고 D-day를 그 날로 잡았다. “정말…….” 경준이 류병열의 말을 끊었다. “짐승 이하로군.” “…….” 호는 부정하지 않았다. 말릴 생각도 없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몇 번이나 주먹이 올라가려 했는지 모른다. 공소시효의 필요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만 했던 이십 여분 이었다. 류병열은 고개를 숙인 채 경준의 비난을 고스란히 듣고 있었다. 바닥을 향해 머리를 떨군 그는 그 날, 그 소년의 귓가에 자신들이 지껄였던 그 말들을 떠올렸다. 내가 네 형을 만졌어…… 나는 여기를 빨아줬지…… 내가 집어넣었어…… 그 때 떠들었던 그 말들을, 자신들은 지금 고스란히 되돌려 받고 있다. “그리고, 그 아이도 죽였습니까?” “아, 아닙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경우 오히려…… 오히려…… 먼저….” “먼저……?” “그러니까,” - Prrrrrrr! Prrrrrrr! 류병열의 목소리를 자르며 벨은 요란하게도 울려댔다. 세 사람은 순식간에 움직임을 멈췄고, 호는 주머니에서 자신의 핸드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 지금 어딥니까? 」 지운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 사건입니다. 신체 일부가 훼손된 시체가 발견 됐습니다. 즉시 현장으로 가 주십시오. 」 “알겠습니다.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그리고, 지원 요청합니다.” 「 지원? 무슨 지원 말입니까? 」 “이번 사건의 중요 참고인입니다.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있는 상탭니다. 지금 즉시 누구 한 사람이라도 보내 주십시오. 위치는……” * 「 그럼, 저희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지금 류병열씨를 보호 해 줄 인원을 요청 해 뒀으니 청에서 사람이 올 겁니다. 문 제대로 잠그시구요, 열어달라고 하면 반드시 누군지 확인을 하십시오.」 「 알겠습니다. 형사님 나머지 얘기는… 」 「 나머지 얘기는 다녀와서 듣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 문이 닫히는 소리를 끝으로 남자는 소형녹음기의 버튼을 눌렀다. 훼방꾼은 떠났다. “자, 슬슬… 사냥을 시작 해 볼까나…….” 허스키한 목소리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공기가 떨리고 있었다. * “류병열씨? 류병열씨 계십니까?” “누구십니까?” “검찰입니다. 한 호 형사로부터 지원 요청 받고 왔습니다.” “아, 들어오십시오.” “감사합니다.” “많이 춥지요?” “네. 그렇군요.” “고생 많으십니다.” “아닙니다.” “저, 뭔가 마실거라도 드릴까요?” “아… 물 한잔 주시겠습니까? 그렇잖아도 목이 마르던 참이었거든요.” “물론입니다. 앉아계세요.” 류병열은 주방으로 걸어갔다. 식탁에 놓인 물주전자를 들고 조심스레 컵에 따르는 그의 뒤에 어느새 뒤따라온 남자가 서 있었다. 품에서 칼을 꺼낸 남자는 소리 없이 팔을 높여들었다. 그 순간, “꼼짝마.” 철컥거리는 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렸다. “움직이면 쏜다. 윤지운, 아니지. 지금은 윤지헌인가.” “…….” 남자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리고 주저 없는 손이, 류병열의 정수리에 칼을 꽂았다. * “윤정아.” 아이가 까만 눈동자를 들어 자신을 바라본다. 그 누군가를 많이 닮은 얼굴에 가슴이 매였다. “자.” 호가 상자를 내밀었지만 아이는 받지 않았다. “안 받아?” “엄마가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거 받지 말랬어요…….” 우물거리는 목소리에 호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나는 모르는 사람 아냐. 아빠 친구야.” “…….” “이건 네 아빠가 대신 전해 주라던 선물이고.” “아빠가 준 거예요…?” 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까 받아도 돼. 그리고 아저씨는 윤정이 엄마 랑도 아는 사이야.” 아이는 쭈뼛거리며 다가와 상자를 받았다. “고맙습니다…….” 꾸벅, 아이스크림이 담긴 상자에 이마가 닿도록 인사하며 까만 원피스 차림의 아이는 추운 듯 어깨를 떨었다. “안 춥니? 그렇게 입고.” “추워요….” “엄마한테 따뜻한 옷 입혀달라고 그래.” “…….” 아이는 다시 새초롬한 얼굴이 되어 입을 삐죽였다. “엄마 아파요…….” “아파……?” 고개를 끄덕이며 조그마한 입술이 움직인다. “아파서, 계속 울어요…….” 호는 고개를 들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바라봤다. 태윤의 아내는 언니인 듯한 여자의 품에 안겨 통곡을 하고 있었다. “그저께부터 계속 아팠어요…… 그래서 이모가 나 놀이방에 데려다줬어요.” “…….” 호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아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돌더니, 이내 아저씨! 하고 낭랑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뒤를 돌아본 호가 왔나, 하고 중얼거리자 경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달려오는 아이를 높이 안아들었다. “윤정이 잘 있었어?” “응!” “들고 있는 상자는 뭐야?” “아빠 선물!! 이 아저씨가 대신 줬어!” 해맑게 웃는 아이에게 그랬어? 하고 대꾸하며 경준은 그 뺨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윤정이 안 추워?” “추워!” “이모한테 가서 얼른 옷 입혀달라고 그래. 그럼 아저씨가 저~기 좋은데 데려가 줄게.” “정말? 나 그럼 가서 옷 입고 올게.” “그래. 얼른 따뜻하게 입고 와.” 땅에 내려주기가 무섭게 아이는 제 이모가 있는 곳으로 달음박질 쳐 갔다. 달려가는 아이를 아픈 눈으로 바라보던 경준이 고개를 돌리며 언제 오셨어요? 하고 묻는다. “방금. 너는?” “저도 방금 왔습니다.”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호는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한 대를 입에 물자 경준이 여기, 하며 라이터를 가까이 가져댄다. 그 노란 불빛에 필터가 타는 냄새가 피어오르고 호는 고맙다, 하고 짧게 말했다. “병원에는 가 보셨어요?” 호는 고개를 저었다. “안 가 보실 겁니까?” “나중에…….” 말없이 바닥을 내려다보던 경준이 불쑥 ‘담배 한 대, 얻을 수 있을까요?’ 하고 물어왔다. 그리고 손으로 가린 채 라이터를 켜 불을 붙이는 남자를 보며 호는 또 잊고 싶은 기억을 떠올렸다. 그 날, - 쉿. 경준은 그렇게 입술을 움직이더니, 이내 태연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타이어에 문제가 생긴 듯 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리고 차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경준의 오른손은 여전히 호의 입을 막고 있었다. 다음 순간 경준은 신문 기사가 프린트된 종이를 펼치고 호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바꿨다. 그리고 오른손에는 펜을 쥔 채 종이에 갈겨썼다. 「 도청당하고 있습니다 」 호의 경악에 찬 시선에 경준은 그의 입을 막은 손을 떼고 주머니에서 또 다른 펜 하나를 빼내어 호에게 건네주었다. 「 도청기는 어디에? 」 경준은 호의 잠바의 접혀진 카라 뒤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다시 종이에 끄적였다. 「 짐작 가는 사람 있습니까? 」 호는 곰곰이 기억을 되짚었다. 지금 입고 있는 잠바는 이틀 전에 갈아입은 옷이다. 그리고 요 이틀 사이에 자신의 옷에 손을 댈 수 있었던 사람……. 선뜻 대답을 못하는 호를 바라보던 경준이 다시 펜을 놀리기 시작했다. 「 윤지운 검사, 맞습니까? 」 호는 다시 한번 눈을 크게 떴다. 「 이 사진을 봐 주세요 」 그렇게 적은 뒤, 경준은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레 종이를 뒤적이더니 그 중 한 장을 빼내어 호에게 내밀었다. 동그란 칸 안에 어린 남자아이의 얼굴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 아이의 얼굴은…… 「 설마, 윤지운? 」 경준은 대답 대신 사진 옆의 깨알만한 글씨를 손으로 가리켰다. 『 사진은 사망한 윤지헌 어린이(13) 』 「 윤지운의 쌍둥이 형입니다 」 그러자 모든 일이 선명하게 들어맞았다. 두 사람은 필담(筆談)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짰다. 도청기를 역이용해 그를 현장에서 잡아들이기로 하고 그 전에 그가 그 계획을 눈치 채는 일이 없도록 자연스럽게 떠들기로 했다. 물론 중요한 내용은 종이와 펜을 이용하기. 다시 차 문을 열었다 닫으며 경준이 말했다. “쥐가 치었어요.” 그 태연한 연기에 감탄하며 자신도 연기를 시작했다. “제발 조심해서 운전해. 시체는 어떻게 했어?” “치웠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동을 걸며, 경준이 말했다. “어딜 가나 쥐들이 극성이라니까. 기분 전화도 할 겸 음악이나 들을까요.” “그러지.” 경준은 귀가 터지도록 시끄러운 메탈을 틀었다. “너, 이런 게 취향이냐?” “기분 전환용입니다. 딱 지금 같은 때를 위한 노래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메탈의 용도는 사실 작은 소리들을 묻어버리는데 있었다. “난 이런 건 도저히 못 듣겠던데.” “선배님은 어떤 음악 좋아하십니까?” “클래식.” “그럴 줄 알았습니다. 자신이 생각해도 태연한 농담이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그야말로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심장도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이대로 기절하고 싶다고 호는 생각했다. 그리고 차가 신호등 앞에 멈춰 섰을 때, 호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 윤지운이 확실하나? 」 애매한 얼굴로 답을 미루는 경준에게 호가 다시 물었다. 「 쌍둥이 형을 죽인 자들에 대한 복수인가? 」 경준은 여전히 애매한 얼굴로 펜을 집어 들었다. 「 이중인격이라는 거 아십니까? 」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하고 어리둥절해 하자 경준이 다시 펜을 잡았다. 하지만 그 순간 신호등이 바뀌었고, 불빛의 색이 바뀌기가 무섭게 뒤에서 빵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쯧, 하여간에.” 펜을 집어던진 경준이 혀를 차며 엑셀을 밟았다. 하지만 당초의 목적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핸들을 꺾는 경준에게 어리둥절해 하는 동안, 그는 핸들을 이리 저리 꺾어대며 한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 끼이이이이이이이익!!!! 예의 그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차를 멈췄다. “젠장, 뭐가 또 끼었나.” 경준은 능청스럽게 그렇게 말하더니 벌컥 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 적당한 공백을 두고, 다시 한 번 크게 외쳤다. “이거 타이어가 완전히 나갔네. 한 선배, 좀 도와주세요! 아, 잠바는 벗는 게 편하실 겁니다!” 그제야 경준의 의중을 눈치 챈 호가 얼른 잠바를 벗고 나갔다. 그리고 경준은 차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호를 부르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 생각엔, 이중인격 같습니다.” “이중인격?” “하나의 육체에 두 개의 인격이 존재하는 거죠. 더 정확히는 두 개의 자아(自我)가 함께 공존하는 겁니다.” “그럼 윤지운의 몸 안에 윤지운과 윤지헌 두 사람이?” “그렇죠.” “그게 가능한 소리야?” 호는 기가 막혔다. 기껏 이런 한적한 곳에 와서 한다는 소리가 그런 허무맹랑한! 하지만 경준은 진지했다. “충분히 가능합니다.” 웃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다. “오늘 기사를 보면서 처음으로 그 생각을 했습니다. 정황으로 미루었을 때 충분히,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윤지운 안의 윤지헌의 자아가 자신을 죽인 남자들에게 복수를 한다면? 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자 수수께끼가 모두 풀렸어요.” “수수께끼?” “태윤 선배의.” 태윤의 이름이 나오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즈끈 거렸다. “아마 태윤 선배도 그 탐문조사 기록을 보고 16년 전의 그 사건을 조사 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 때 죽은 윤지헌이 윤지운 검사의 쌍둥이 형이라는 사실도 알았겠죠. 그건 사진만 봐도 알 수 있는 문제였으니까요. 그리고 이리저리 생각을 하던 중에, 윤지운 검사를 만난 겁니다.” “그리고…?” “그리고…… 아마, 그가 윤지운이 아니라는 사실도 눈치 챘을겁니다.” “뭐?” “더 정확히는 윤지운 이되, 윤지운이 아니라는 사실 말이죠.” “어떻게?” “예를 들면, 에제키엘.” “에제키에엘?” 점점 더 알 수 없는 소리에 호는 이제는 짜증이 나려고 했다. 그건 또 어떻게 귀신 같이 눈치 챘는지 경준이 '짜증내지 말고 들어주세요.' 하고 달래듯이 말했다. “오늘 윤지운 검사에게 류병열을 만나러 간다는 보고를 하면서 일련의 사건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윤지운 검사, ‘찢어진 종이는 역시 에제키엘 23장?’ 하고 묻더군요. 그 땐 이 사람, 천주교 였던가 하고 생각했지만 뭔가 이상한겁니다. 제가 기억하기론 분명 무교였거든요. 그리고 바로 엊그제 윤상재 사건으로 얘기를 할 때는 ‘에스겔’ 이라고 말했구요.” “…….” “그리고 생각해보건대, 그 때 윤지운 검사 목소리가 이상했습니다.” “목소리……?” “평소보다 더 낮고, 허스키했습니다. 목이 잠기거나 감기에 걸린 정도가 아니었어요. 비슷하지만, 분명 다른 목소리였습니다. 다중인격의 경우, 인격 하나하나의 목소리가 완전히 다른 경우가 분명히 있거든요.” 그제야 호는 새벽녘, 지운의 목소리가 좀 더 허스키하고 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자신의 옷에 도청기를 단 존재에 대한 의문도 설명이 되는 셈이다. “아저씨!” 맑은 목소리가 달려온다. 조금 이르다 싶은 두툼한 코트를 껴입은 아이가 구르듯 달려와 경준의 품에 안겼다. “따뜻하게 입었네. 이모한테는 말 하고 왔어?” “응! 아저씨랑 놀러 간댔어. 우리 빨리 가자! 빨리!” “그래. 그 전에 아저씨한테 인사 해야지.”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꾸벅, 호를 향해 인사했다. “안녕히 계세요.” 추위에 빨갛게 언 아이의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경준도 고개를 숙였다. “가보겠습니다.” “그래.” 돌아서며, 경준은 읏차! 하고 아이를 제대로 안았다. 꽁꽁 얼었네, 하며 아이의 볼에 자신의 뺨을 부비는 경준의 얼굴이 마치 그 누군가를 바라보던 그 때의 표정과 같다고 호는 생각했다. * 호가 지운을 찾은 건 이듬해 봄,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4월이었다. 간호원과 함께 복도를 걸으며, 호는 지운의 담당의사가 한 말들을 떠올렸다. ‘윤지운씨 같은 경우는 자신의 일부와도 같았던 존재가 사망하자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안에서 그 존재를 키우며 살아오다 결국 인격이 나뉜 겁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폭행을 당했다거나 하는 끔찍한 기억은 모두 자기안의 또 다른 자아… 그러니까 쌍둥이 형의 인격에게 미뤄버리는 거죠. 그렇다보니 긍정적인 것, 올바른 것만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려는 선한 자아, 즉 윤지운 검사로서의 자아와, 부정적인 것, 모든 옳지 못한 기억을 끌어안은 어둠의 자아… 범죄자 윤지헌의 자아로 완벽하게 분리된 겁니다.’ ‘그게 가능 한 겁니까?’ ‘흔하다면 흔하다고 할 수 있는 케이스죠.’ 의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안 좋은 기억을 모두 끌어안고 점점 악해져만 가는 자아와 세상의 밝은 면만을 보고 올곧게 살아온 또 하나의 자아. 이것들이 대립해 가는 과정에서 나쁜 기억은 죄다 자신에게만 미루고, 저는 편하게 지내는 동생이 미워진 형의 자아는 동생의 전화기에 협박성 메시지를 남긴다거나 하는 식으로 괴롭혀 온 거죠. 물론 윤지운 본인은 그 또 하나의 자아의 존재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보니 분명 자신이 한 짓임에도 불구하고 그걸 기억하지 못하는 거죠. 제 3의 인물이 저지른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상태는 어느 정도입니까?’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는 쇼크로 기억의 상당 부분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자신이 지금 열세 살 이라고 믿고 있더군요. 우리는 그에게 일기를 쓰라고 했습니다. 오늘 있었던 일은 물론, 생각나는 게 있으면 무엇이든지 적으라고 했죠. 처음엔 많이 혼란스러워 하더군요. 하지만 치료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는 점차 '윤지운' 으로서의 자신을 찾는 듯 했습니다. 오락가락하던 일기도 차츰 ‘윤지운’의 이야기로 정착되어 가고 있구요. 이대로라면 생각보다 빨리 퇴원이 가능 할 지도 모릅니다.’ “여기예요.” 문을 열던 간호사가 어머… 하며 작게 신음했다. “잠들었나 봐요. 아까까지 깨 있었는데…….” “얼굴만 보고 가겠습니다.” “그러세요.” 호가 침대를 향해 걸어가는 동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위에서 내려다 본 지운의 얼굴은 몹시 편안해 보였다. 반 년 만에 보는 연인의 얼굴에 호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반 년 동안 단 한번도 볼 수 없었던 이유는 병원 측의 면회금지령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다시 그를 만날 자신이 없었던 데에 있다. 만나면,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호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마주대하고 보니 그저 애틋한 마음만이 피어오른다. 터질 듯 한 분노도, 치를 떨던 배신감도 온데 간데없고, 오로지 안타까울 뿐이다. “정말… 지독한 인연이로구나.” 가슴 위에 놓인 손을 살며시 잡으며 호는 중얼거렸다. 당시에 호는 스물한 살, 경찰 대학교 2학년이었다. 겨울 방학을 맞아 집에 왔지만 언제나 그랬듯 부친은 그 얼굴 한 번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당시에 부친은 매스컴에서 떠들어대던 초등학생 유괴사건의 수사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유괴 되었다던 아이는 이미 동네 야산에서 시체로 발견된 상태였다. 증인도, 증거물도 하나 없는 사건. 그야말로 맨땅에 머리 박치기 식으로 부친과 그 팀원들은 수색에 수색을 거듭했다. 그러던 하루는 서(署) 부친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경찰수첩이 아무데도 없는데, 아무래도 어제 그 아이의 집에 방문했다가 거기서 흘리고 온 것 같다고 지금 가서 수첩을 찾아보라는 게 용건이었다. 바쁠 일도 없었던 호는 알았다고 대답하고 아이의 집을 찾아갔다. 의외로 가깝구나하고 생각했지만 따지고 보면 의외 일 것도 없다. 지하철로 10분 거리에 부친의 직장이 있었다. 그 관할 안이라고 생각하면 아무리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의 거리다. 뉴스에서 몇 번이나 본 덕에 아이의 집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지만 쉽게 들어 갈 수는 없었다. 밖에서 몇 번이나 초인종을 눌렀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냥 돌아갈까 하다가 혹시나 하며 밀어본 대문이 소리도 없이 벌어져 호는 잠깐의 고민 끝에 들어가기로 했다. 부친의 경찰수첩은 의외로 쉽게 찾았다. 마루 바닥에 여보란듯이 떨어져 있는 수첩을 주우며 호는 쓰게 웃었다. 우리 아버지도 늙긴 늙으셨구나, 하며 돌아서는 순간, 집 안쪽에서 뭔가 수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눌러도 대답 없던 초인종을 떠올림과 동시에 호는 ‘뭔가’ 가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그 때 다시 한번 소리가 들렸다. 사람 목소리 같기도 하며 짐승의 울음소리 같기도 한… 그것은 마치 찌부러지는 듯 한 신음소리였다. 그리고 그 고통에 찬 신음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갑자기 뚝 멈추었다. 날듯이 뛰어올라 현관문을 연 호의 시선 안에 신음의 주인공이 들어왔다. 발가벗은 아이였다. 아래는 온통 피에 젖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은 택시 안에 있었다. 입고 있던 잠바로 아이를 감싸 안고, 구급차를 기다릴 틈도 없이 달려 나와 택시를 잡아탔던 거다. 병원까지 가는 내내, 호는 아이를 껴안고 울었다. 도착하자마자 아이는 응급실로 실려 갔고, 연락을 받고 아이의 부모와 경찰들이 달려왔다. 그 중에는 호의 부친도 있었다. 부친의 질문에 답을 하고 집으로 돌아간 호는 그날 내내 아이의 상태가 걱정되었다. 그리고 그 날, 집으로 돌아온 부친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너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다. 장까지 다친 모양이야. 거기다 폐렴증세까지 보인다며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장담 못 할 상황까지 갔을 거라고 하더구나.” 호는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후 부친으로부터 지나가는 말로 아이가 그 때 일을 기억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는 곧 잊어버렸다. 그 아이가 바로, 지운이었다. 기가 막힐 정도로 끔찍한 인연이다. 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차라리 그 때 널 구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비록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고는 하지만 그 다섯 명의 남자가 그렇게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을까. 자신은, 몇 번이고 울면서 꿈에서 깨어나야 했을까. 지운은, 이렇게 모든 것을 잃고 병원의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을까. 오늘날, 이렇게 모두의 가슴을 쥐어뜯는 상황이 벌어졌을까. “…….” 몇 백번, 몇 천번을 생각 해 봐도 다 부질없는 짓이다. 그 사실을, 호는 잘 알고 있었다. “빨리… 나으면 좋겠다.” 이제 함께 그 복도를 걸을 수는 없겠지만, 남들의 시선을 피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을 수도 없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빨리 나을 수 있길, 호는 진심으로 빌었다. 함께 손을 잡고, 햇살이 쏟아지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면 좋겠다. 누구의 눈치를 살필 것도 없이, 꼬옥, 꼬옥 손을 잡고서.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또 올게.” 붙잡고 있던 손등에 살며시 입을 맞추고, 이불 안으로 넣어주었다. 잠자는 연인을 뒤로 한 채, 호는 조용한 병실을 떠났다. -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지운은 눈을 떴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는 잠시 후,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멀리 호의 등이 보였다. 멍하니 그 등을 바라보던 지운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찾았다. 여섯 번째 남자.” 그 입술을 비집고, 목소리 하나가 흘러나왔다. “네가 윤지운을 살린 놈이었구나.”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여섯번째 남자. 끝. 20031118.ijen ================================================ 후기를 빙자한 넋두리 (...)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인사드리는 ijen입니다. (그다지 오랜만은 아닌가;) 먼저..도중에 내치지 않고;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_ _) 검찰은 커녕 경찰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게 없는 제가 순전히 인터넷에 의존해 쓴 글입니다. '엇, 저건 사실과 달라. 뭐야, 저런게 어딨어~' 하는 문제는... 부디 넘어가 주시기 바랍니다;ㅁ; (어째서 단순 자살사고에 경찰이 아닌 검찰이 개입 한 거냐...고 물으셔도.. ...검사가 등장해야했기에...어쩔 수 없었습니다...라는 얼빠진 대답만이ㅜㅜ) 늘 신세지고 있는 비천무희님의 리퀘로 쓰게 된 스릴러입니다. 스릴러? 저게 어디가 스릴러야!!! 하고 분개하시는 분!!! ...이것도 부디 넘어가주세요;ㅁ; (제발 제발 ㅠㅠ) 스릴러를 리퀘받아 쓴 글이니, 이건 스릴러야!!! -라고 우기는 중입니다 ㅠ.ㅠ (아까부터 계속 말 안되는 소리만 ㅡㅜ) ...스릴러는 도저히 안 되더라도..적어도 미스테리어스한 추리극으로 가자.. 고 생각했습니다만...추리고 나발이고.....경준이 자식이 잘난 척 하며 주절 주절 떠들어 댈 때는 아주 그 입을 조져버리고 싶은 충동이..ㅜ.ㅜ (하지만 경준이 입을 조져버리면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ㅅ; 결국 下 편에서는 *표만 작렬... 능력부족 입니다 ㅠ.ㅠ) 처음엔 나름대로 멋져 보이던 호 아저씨도 나중엔 경준이에게 휘둘려 이리 저리 끌려다니고...어흐흐흐흑 ㅠ.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글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정경준입니다. 저는 아무래도 조연수에게 집착하는 타입인가 봅니다..(...) 난생 처음 도전해 보는 스릴러(←양심없다ㅡㅜ)였습니다;; 이것 저것 자세하게 조사해서 제대로 된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만... 시간도 부족했어요 ;ㅅ; 기한 한에 다 써야했기에... 조금만 더 넉넉하게 썼어도 이거보단 좋았을텐데!!! 하고 자위도 해 보지만.. 결국 정해진 시간은 시간대로 오버하고 ㅠ.ㅠ 글은 글 대로 엉망이고...흑흑 선물이라고 드리기에도 민망합니다ㅜ_ㅜ (..하지만 드린다;;;) 몇가지 엥? 하실수도 있는 부분에 대해. 上에서 지운이 에페소의 농담을 하는데요, 지운은 부모님에게 이 이야기를 들은게 아닙니다. 성당에 다니던 지헌이에게 들은거예요. 이 이야기가 하나의 복선이 되도록 꾸밀 생각이었는데 넣을 자리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양해를(_ _); 제일 앞에 나오는 첫번째, 두번째, 세... 남자에 보시면 첫 번째부터 다섯번째 까지는 지헌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여섯번째 남자는 지운의 이야기, 즉 호를 지칭하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지헌은 자신을 죽인 다섯 남자와, 지운을 살린 여섯 번째 남자, 모두에게 복수를 할 생각이었던 겁니다. 자신은 이미 죽어버렸는데 지운은 살아남았죠. 그 여섯 번째 남자덕에. 어떻게 자신에게 전화를? ..간단하게 잠 든 도중에, 혹은 운전 도중에도 아주 깜박거리며 지헌이 튀어나와 전화를 걸어둔 겁니다. 예를 들어 제일 첫 메시지는 지운이 엘리베이터안에서 잠깐 졸았나..? 하는 그 때, 지헌의 자아로 바뀌어 전화를 걸었던 겁니다. 지운은 한번도 그 전화를 직접 받지 못했습니다. 그야, 자신이 건 전화니까요 ^^ (이런 설명 필요없으시다구요 ㅡㅜ?) 참고로 호와 검사실에서 씬을 벌일 당시, 그는 지헌이었습니다. 애초에 도청기를 달기 위해 유혹-_-; 한 거죠. 지금부터 붙잡아 두어야 집에도 못 갈 테고 옷도 못 갈아입을 테고...자기가 도청기를 달기도 쉽고... 뭐어; 이런 저런 이유로 느닷없이 복도에서 입술을 덮친 겁니다 ^^; ....이야기를 할 수록 어지러워만집니다 ;ㅅ; 그냥, 한번 훌러덩 읽고...홀라당 잊어주세요 (_ _) 무려 20일이나 늦었지만; 비천무희님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언니..죄송해요...나름대로 쓴다고 썼지만...이런게 나와버렸습니다 ㅜ.ㅜ 참고로 성당과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 에겐 전혀! 전혀 아무런 감정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종교를 모독했어!!! 하고 짱돌을 집어드신 분들!! 부디 진정하세요;ㅁ; 정말로 단지 소설안의 소재를 위해 끌어다 붙인 이야기입니다. 개인적인 사심은 전혀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저..'머리 나쁘면 손발이 고생이다' 를 온 몸으로 체험한 글입니다. 긴 글, 긴 후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지금 이 순간 당신은 이 글에 대한 모든 걸 싹 다 잊는겁니다. 레드썬 -_-!